RM의 1억 기부가 남긴 질문 [이지영의K컬처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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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의 1억 기부가 남긴 질문 [이지영의K컬처여행]
신뢰는 기부의 통화다. BTS RM이 “제복 근무자를 돕고 싶다”며 보훈부에 1억원을 기부했고, 보훈부는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해 지정 기부 참여를 폭증시켰다. 여기까지는 선순환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후 드러난 사실은 정반대다. 기부금이 법적으로 한 계정에 섞여 버려 지정한 용처로 집행됐는지 확인할 수 없고, 보훈부는 이를 알면서도 시행령을 고쳐 홍보를 밀어붙였다고 한다. 홍보는 앞섰지만 시스템은 부재했다.

문제의 핵심은 ‘말과 돈의 방향’이 어긋났다는 데 있다. 홈페이지는 분야별 지정 기부가 가능한 것처럼 안내하지만, 실제 회계 구조는 이를 반영하지 못한다. 시민은 특정 대상을 위해 지갑을 열었는데, 행정은 “어디에 썼는지 알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것이 반복되면 무엇이 남는가. 다시는 기부하지 않겠다는 냉소뿐이다. 신뢰를 한 번 잃으면 두 번째 기부는 없다.

타격은 특히 팬덤에 크다. 팬덤은 스스로 조직하며 의미를 위해 지갑을 연다. 그 의미가 결과로 이어지지 않으면 참여의 학교는 환멸의 현장이 된다. 스타의 이름으로 모금하고 막상 쓰임은 추적되지 않는다면 공공은 가장 역동적인 시민 에너지를 스스로 소진시키는 셈이다. 이런 사례가 반복되면 기부 문화 전반, 더 넓게는 K컬처의 공공 연대도 급속히 식을 것이다.

해법은 분명하다. 첫째, 법·회계 분리: 용도제한기금 도입, 사업코드·분리계좌·전용 금지의 원칙을 명문화하고 미집행·변경 시 환원·재지정 권리를 보장하라. 둘째, 투명성 인프라: 사업명·집행액 잔액·일자를 공개하는 실시간 대시보드, 외부감사·성과평가, 전자영수증에 사업명을 의무 표기하라. 셋째, 윤리 가이드라인: 스타 연계 모금은 홍보 전에 법적 근거·회계 체계·집행 일정을 점검하고 표준 약정서에 용도·기간·불이행 시 조치를 명시하라. 넷째, 참여 거버넌스: 기부자 자문과 수혜자 대표가 분기별 공개 브리핑에서 피드백을 주고 필요시 환불·재배분 절차를 작동시키라.

국가의 이름으로 신뢰를 모았다면 국가의 방식으로 책임을 보여줘야 한다. RM의 1억은 돈 이상의 상징이었다. 그 상징을 지키는 길은 사과의 수사보다 구조의 업데이트다. 투명한 회계, 분리된 용도, 추적 가능한 집행, 책임 있는 보고-이 네 가지가 작동할 때 비로소 ‘다음 기부’가 가능해진다. 팬덤의 열정은 공공의 선으로 번역될 수 있다. 전제는 간단하다. 신뢰를 낭비하지 않는 것. 그것이 기부문화와 팬덤문화가 함께 자라는 유일한 길이다.

이지영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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