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나는 영덕에서 며칠 보냈다. 발코니에서 해변으로 내려가던 길이 사라지고 발코니가 있던 예쁜 집도 불탔지만 바다는 여전히 파도쳤다. 폐허를 비추며 떠오르는 아침 해의 아름다움에 소름 돋고 몸서리가 쳐졌다. 아담한 집들이 모여 있던 절벽 해안마을은 대형산불로 잿더미가 된 지 열 달이 되어 가지만 여태 복구공사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날 풀리면 길 만들고 기초공사도 시작하려나?’ 중얼거리며 내가 살던 집, 터라도 밟아보려고 벌목된 나뭇단 사이로 아슬하게 몇 개의 절개지를 건넜지만 길이 끊어져 도저히 근접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기다시피 방파제로 내려가 마을을 올려다보았다. ‘절벽에 옹기종기 자리한 집들이 마치 바위에 붙은 따개비 같다 하여 일명 따개비 마을이라 불리는 곳이다’라고 적힌 커다랗고 둥그런 바위는 불타지 않았다. ‘저기는 배 타는 언니네, 저긴 대구 할머니네, 저긴 피아노 치는 언니네, 저긴 화재로 돌아가신 백세 할머니네…’ 나는 다정하고 평화로웠던 마을 풍경을 그려보다가 뚝뚝 눈물 흘렸다.
김이듬 시인·서울대학교 강사 작년 3월 이후 나는 무덤덤한 표정을 일관되게 유지하려 애썼다. 개인적 불행이나 나쁜 기운을 사람들 속에 풀어놓아 모두의 기분을 망치긴 싫었기에, 혼자 감내했다. 강의실에서나 모임 중에 실없는 농담도 했던 것 같다. 다이소, 아름다운 가게에 자주 들렀다. 어떤 날은 후배 시인이 새 가방이며 새 옷들을 선물해 주었다. 우리는 삼송역 근처에서 돈가스를 먹었는데 그 후배는 내게 아무런 동정이나 위로를 건네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무심한 척하는 태도가 고마웠다. 주변에서 내게 주는 안부인사나 위로의 말, 충고 등이 모두 나를 다시 불길 속으로 밀어 넣는 소리처럼 들리던 시절이었다. 불에 그슬려 비뚤어진 마음으로 참혹한 세상을 견디고 있던 터라, 그들의 좋은 말이 비웃음이나 배부른 말처럼 느껴졌다. 죽을 것 같던 봄이 지나고 해와 달이 떠내려가고 어느덧 새해가 되어서야 나는 한 편의 시를 읽었다. 월간문예지 ‘현대시’에 나희덕 시인이 발표한 신작시 ‘불의 혀’라는 작품인데 후반부를 옮긴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 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 그마나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지만//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그날 나는 방파제에서 올라와 7번국도 옆 몇 채의 임시주택 문을 두드렸다. 내게 온 우편물이 혹시 있는지 여쭈었다. 택배 기사분이 내 앞으로 온 책들을 갖다 둘 데를 몰라서 어디다 맡겼다고 했으니까. 내 옆집에 사셨던 아주머니 집 안은 매캐하고 어두웠다. “추워서 문 꽉 닫고 종일 TV만 보는 거예요?” 내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어제 먹던 김치찌개 데우려다 태울 뻔했어. 냄새 심하지? 온 김에 밥 먹고 가!” 아주머니는 내 손목을 끌어 밥상머리에 앉혔다. 가까이서 뵈니 초췌하니 눈도 충혈된 아주머니, 감옥이 따로 없다고, 안 나다녔더니 다리가 곯았다고 하셨다. 마을이 불타기 전엔 온종일 밭일하고도 활달하게 온 마을 돌아다니며 재미난 소식을 들려주셨던 분인데….
추석엔 자식들이 와서 창고에서 자고 갔지만, 오는 설날에는 어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한두 달 부산 딸네에 가서 손주들과 지내봤지만 당신 평생 사셨던 석동 바닷가만치 마음 편한 곳은 없다고 하시며 하루속히 그 자리에 다시 집 짓고 사는 것밖에 달리 소원이 없다고 하셨다. “그나저나 이리 사느라 지원금 다 써버려 뭔 수로 집을 짓지? 그날까지 살아낼는지….” 나는 수도관이 얼어 물이 나오지 않는 임시주택을 빠져나오며 혀가 마르고 기가 찼다.
김이듬 시인·서울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