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담 넘어온 대추 한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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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담 넘어온 대추 한 알
조상들 콩 심을때도 나눔 생각 새참 땐 음식 나누는 ‘고수레’도 최근 함께한 작가들 플리마켓 나눔과 만남 즐거움이 함께해
한가위 연휴가 길었다. 경주 시댁에 머물면서 도시에서 볼 수 없는 총명한 별과 누런 가을 들판을 누렸다. 그러나 비가 잦아서 별을 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루 끝에 앉아서 이제 쓸모가 없어진 경운기를 내다보거나 비를 맞으며 뒤뜰을 어슬렁거렸다. 댓잎은 어우러져 숲을 이루고 옆집 담장에서 넘어온 대추나무는 빗물에 더 번들거렸다. 대추 알이 참 실했다. 대추 알을 만지작거리다가 담 넘어온 과일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말이 생각나서 얼른 손을 거두었다. 자세히 보니 우듬지 쪽은 아주 실한 열매가 달려 있었지만 담장 이쪽으로 넘어온 가지에는 이미 그 집에서 수확한 흔적이 있었다. 괜히 그 인심이 좀 박하게도 느껴졌지만 뭐 대추가 무슨 별맛 나는 과일도 아니고, 남의 과일에 관심 두는 것도 사실 우스웠다.

그러나 무엇이든 나누던 옛 인심 같은 것이 살짝 그립기도 했다. 이제 그런 인심은 시 속에서나 볼 수 있게 된 것인가.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 말가웃은 된다고 빙그레 웃었다 /중략/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 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송찬호 시인의 시 ‘가을’ 중에서 인용) 두 말이면 36㎏쯤으로 환산된다. 이 시 속의 콩밭 주인은 그리 많지 않은 수확을 하고도 충분히 만족해한다. 그러면서 콩새에게 콩알을 주워가라고까지 하는 넉넉한 인심은 더없이 따뜻하다.
천수호 시인 사실 우리 조상들은 콩을 심을 때부터 나눔의 마음을 가져왔다. 콩을 세 알씩 심는 이유가 있다. 물론 발아가 되지 않을 것에 대한 대비이기도 하겠지만 한 알은 새의 몫이고 또 한 알은 벌레의 몫이며 나머지 한 알이 사람의 몫이라는 나눔의 마음이 있었다. 그 콩알이 한참 자랄 즈음에 논밭일이 바빠지면 들판에서 새참을 먹는 일이 잦다. 그때에도 수저를 들기 전에 먼저 신과 자연에 ‘고수레’를 던진다. 폴 발레리도 그 너른 바다에 포도주를 고수레로 던지지 않았던가. “나는, 어느날, 망망한 바다에 (그러나 어느 하늘였던가) 허무에 바치는 고수레인 양 귀중한 포도주 몇 방울을 뿌렸다 /중략/ 그 포도주는 사라지고, 취한 파도! 나는 쓰라린 대기 속에 가장 그윽한 형상들이 뛰어오르는 것을 보았다”(폴 발레리의 시 ‘잃어버린 포도주’ 중에서 인용) 그 너른 바다에 뿌린 포도주는 사라진 듯 보이지만 대양을 취하게 하지 않았던가. 작은 나눔의 흔적은 그냥 사라져 버리지 않는다.

얼마 전 한국작가회의 성평등위원회에서는 작가들의 플리마켓을 열었다. 젊은 작가들이 글을 쓰는 시각장애 여성들과 연대하기 위해 개최한 행사다. 창비 지하 1층에 몇 개의 방은 작가들의 애장품들로 가득했다. 자신들의 책은 물론이고 평소 즐겨 들던 가방, 옷, 신발을 비롯하여 인형, 만년필, 직접 볶은 원두까지 책상마다 그득 진열되었다. 행사가 시작되자마자 작가들은 물건을 팔기보다 오히려 다른 작가들의 물건을 사느라 바빴다. 서로의 물건을 구입하며 복작복작 모처럼 만남의 즐거움까지 나눴다. 처음 물건을 파는 수줍음으로 자신의 물건에 값을 매기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모습까지 정겨웠다. 한 시인은 유료 즉석 시 코너로 이 아름다운 나눔의 자리에 동참했다.

이 행사는 물품 후원 작가와 셀러 작가를 따로 정해 놓고 시작했지만, 그 외 많은 작가가 물건을 들고 왔고 또 판매도 했다. 종일 노력한 작가들의 기쁨은 판매액의 결과에서 더 커졌다. 구입해 온 물건을 풀어서 정다운 사람들에게 다시 나누는 마음 또한 기쁨이었기에 작가들은 물건을 파는 일도, 사는 일도 행복한 하루였다. 무엇보다 나는 황혜경 시인이 판매한 말하는 앵무새가 무척 마음에 든다. 민구 시인이 직접 볶은 원두도 향기롭고, 권박 시인의 스웨터도 넉넉하고 포근하다. 박소란 시인이 이기리 시인 판매대에서 구입해 선물해 준 겨자색 스카프도 퍽이나 마음에 든다. 나눈 걸 또 나누고, 그 나눔을 또 나눈 그날의 풍경은 담벼락에 넘어온 대추 한 알의 서운함을 다 이겼다.

천수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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