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독서 모임에서 한가위 연휴에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 달라는 청을 받았다. 올여름 한국 작가들의 빼어난 소설책과 시집이 쏟아져 나왔으니, 딱히 제목을 꼬집어 말하기 어려웠다. 번역서 중에서 예측을 빗나감으로써 흥미로웠던 책 두 권 소개한다면, 우선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가 있다. 세계적인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가 쓴 책으로, 그는 ‘역사상 가장 끔찍한 오늘’, ‘날로 증가하는 폭력’이라는 관념에 의문을 품고 기원전 8000년부터 20세기에 이르는 기나긴 폭력의 역사적 궤적을 탐색하여 의외의 결과를 도출했다. 인류 역사에서 폭력은 증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소하고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덜 잔인하고 덜 폭력적이며 더 평화로운 시대라는 충격적인 보고서였다. 우리가 오늘날 평화를 누리는 까닭은 옛 세대들이 당대의 폭력에 진저리 치면서 그것을 줄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므로 우리도 우리 시대에 남은 폭력을 줄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했지만, 나는 지금도 끊임없이 자행되는 전쟁과 범죄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책으로는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가 있다. 이 소설은 간결한 문장으로 엮인 얄팍한 작품이라 부담 없이 금방 읽을 수 있다. 나는 이 책의 제목만 보고 보육원 같은 시설에 맡겨진 소녀의 암울하고 슬픈 서사가 펼쳐질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웬걸! “일요일 이른 아침, 클로너걸에서의 첫 미사를 마친 다음 아빠는 나를 집으로 데려가는 대신 엄마의 고향인 해안 쪽을 향해 웩스퍼드 깊숙이 차를 달린다. ”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먼 친척의 집에 맡겨진 소녀가 처음 받아보는 관심과 배려 속에서 밝게 성장하는 이야기다. 순수한 사랑과 여름날의 싱그러움으로 가득한 장면들.
김이듬 시인·서울대학교 강사 나는 사랑 없는 가정에서 새엄마의 미움과 구박을 받으며 자랐다. 내가 반항했기 때문에 매를 번 측면도 있다. 사춘기 때는 차라리 친척 집에 나 좀 맡겨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맡아줄 일가친척도 없었던 나는 틈만 나면 책 속의 낯선 세계로 도피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글 쓰는 사람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 지나고 보니 책을 읽고 쓰는 게 내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었다. 올여름 글을 쓸 수 있는 주거 환경이 절실했다. 영덕에 있던 작업실이 불탔기 때문에 나는 불안하고 예민하며 절망스러웠다. 내게 선견지명 같은 건 없었으나, 작년에 창작공간 입주공모사업에 신청했는데 천만다행 선정되어 7월부터 9월까지 석 달 가까이 연희문학창작촌 입주 예술가로 생활할 수 있었다.
연희문학창작촌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있다. 주택가 골목 끝의 독특한 철문을 통과하면 벽면에 작가들의 핸드 프린팅이 보인다. 조금 올라가면 아름다운 소나무 숲 산책로와 집필실이 보여 놀라게 된다. 숲 속 벤치에 앉아 눈 감으면 번잡한 도심에서 신비롭고 고요한 세계로 순간 이동한 기분이 들 것이다. 야외무대 지나 나무계단을 오르면 ‘책다방 연희’가 있다. 숨 돌리고 차 한잔 하며 넘쳐나는 책 중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뽑아 읽자. 누구든지 매력적인 이 공간을 무료로 즐길 수 있다. 누군가는 작가의 꿈을 다질 수 있다. 2013년에 여기서 열린 소설창작워크숍에 참석했던 강흰 작가는 십여 년 만에 입주 작가로 선정되어 나의 집필실 아래층에 있던 자신의 집필실에 밤새 불 밝히고 첫 소설책을 준비 중이었다. 창작촌 작가들은 서로 얼굴 마주칠 일 거의 없었지만, 저마다 창작의 고통을 행복하게 감내하며 뜨거운 여름을 보냈을 것이다. 어른 작가들을 맡아준 연희문학창작촌에 감사한다.
이제 곧 연휴다. 차례 지내고 성묘하랴, 여행하랴 바쁜 사람들, 밀린 업무 보느라 쉬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겠다. 어디선가 혼자 앓고 있는 사람은 어떡하나. 나는 친척 언니를 뵈러 멀리 갈 것이다. 방사선 치료를 위해 요양병원에서 지내는 언니는 시도 곧잘 쓰셨다. 내가 좋아하는 시집들 한아름 안고 병문안 가야지. 병원에 맡겨진 신세타령 말고 시를 지으라고 해야지. 창작이 치유와 위로라는 성급한 말은 삼킬 것이다.
김이듬 시인·서울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