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고통이 따르겠지만 한 번은 끊어야 할 시점이었다. 과거에는 서민 주거 안정을 명분으로 대출을 늘려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구조적 한계에 이르렀다. "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달 한은 국정감사에서 우리나라 전세 제도와 전세대출을 일컬어 한 말이다. 전세대출이 늘면서 가계 부채비율도 빠르게 올라갔고, 부동산 시장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고 봤다. 전세대출은 우리나라 주택시장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이차보전, 수십 배 유동성 공급 비결
전세대출은 일반적인 담보대출과 달리 담보의 실체가 없다. 공공기관이 발급하는 보증서가 담보 역할을 한다. 국토교통부 산하 공기업인 주택도시보증공사(HUG)를 비롯해 한국주택금융공사(HF), 서울보증공사(SGI)가 보증서를 댄다. 정부의 의도가 상품에 작용한다는 얘기다.
정부는 주택도시기금을 통해 직접 자금을 풀기도 했다. 과거 '국민주택기금'에서 2015년 '주택도시기금'으로 재단장하면서 버팀목 대출(전세자금)을 본격적으로 늘렸다. 재출범 첫해인 2015년 4조4000억원 수준이던 버팀목 대출 실적은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9년 8조8500억원 수준까지 늘었다.
이뿐만 아니라 정부는 정책대출 금리와 민간 시중은행 금리 간 차이를 메워주기 위해 이차보전 사업도 하고 있다. 버팀목 대출로 2%, 시중금리 4%를 적용받는 차주가 있다면 은행이 2%로 우선 대출해주고 2%포인트는 정부가 기금 사업비로 추후 은행에 지급하고 있다는 뜻이다. 차주 입장에서는 싼 정책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은행 입장에서도 정부가 기금으로 금리 차이를 보전해주니 손해 볼 게 없다. 정부도 보증서만 끊어주면 되니 적은 예산을 들여 서민 주거 안정을 챙긴다는 생색을 낼 수 있다.
이차보전은 과거 일으킨 대출을 상환하는 과정에서도 활용된다. 그래서 그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차보전 방식을 활용하면 수십조 원의 자금이 시장에 추가 공급되는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정도의 추산이 가능하다. 통상 정책대출과 시중 금리 차이는 2%포인트 정도로 본다는 점에서 단순 계산으로만 해도 약 50배의 레버리지를 일으킨다고 추산할 수 있다.
가령 기금에서 100억원으로 한 명당 1억원씩 대출한다고 가정하면 100명에게 돌아간다. 그런데 100억원을 이자를 보전해주는 데 쓰면 대상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정책금리를 3%, 시중 은행금리를 5%로 치면 연 이자는 200만원 차이가 나게 된다. 이를 기금에 있는 자금 100억원으로 지원해주면 5000명이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금리 차이가 1%포인트라면 100배, 3%포인트라면 33배 정도 대출받는 사람이 늘어나는 구조다. 올해 이차보전 사업예산은 1조8398억원, 내년에는 1조9720억원으로 잡혀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은행 자금을 활용해 어렵지 않게 기금 수혜 대상을 대폭 늘릴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 당국자로서는 충분히 선택할 만한 옵션이었을 것"이라며 "다만 궁극적으로는 주택시장 불안을 가중했다는 점에서 모르핀 처방을 수년째 지속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정책대출, 가계부채·집값 상승 부채질"
버팀목 대출 등 정책 대출은 다가구·다세대, 연립 등 상대적으로 중저가 주택 수요층을 대상으로 한다. 인위적인 자금 공급이 없었다면 전세보증금이 낮은 수준을 유지하거나 떨어져야 한다. 그런데 전세대출이 계속 유입되면서 수요 대비 높은 가격을 형성하게 됐다.
특히 세입자가 공적 재원을 조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임대인은 전셋값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주택시장에서 낮은 층위에 있는 비아파트 전세 매물의 가격이 점차 오르면서 상위 전세 물량의 가격도 밀어 올리는 효과를 냈다. 부동산원의 주택매매지수와 전세가격지수를 비교하면 2008년 이후 가파르게 뛰던 전셋값이 5, 6년가량 시차를 두고 매매가격을 끌어올리는 모양새를 띤다. 이후 2020년대 들어 매매가와 전세가 모두 급등한다.
백두진 서울시 부동산금융분석팀장은 "무주택 서민이 대출로 쉽게 전세자금을 구할 수 있게 되면서 전셋값이 상승하고 주택가격도 연쇄적으로 올랐다"며 "결국 서민은 전세 재계약을 할 때마다 전보다 더 많은 대출을 받는 악순환에 빠지게 됐다"고 지적했다.
사실 2000년대 들어 저금리 기조가 굳어진 데다 집값 상승의 기대감이 낮은 상태를 유지하는 등 전세 제도가 점차 스러질 만한 여건이 조성됐다. 그러나 지금껏 명맥을 유지하게 된 것은 전세대출의 영향이 크다.
최근에는 서민을 위해 쓰여야 할 정책대출의 지원 범위가 고소득층까지 넓어지기도 했다. 디딤돌(구매자금)·버팀목 신생아 특례는 소득 기준이 2억원(맞벌이 기준)으로 상위 2% 이내까지 가능하다. 무주택 서민을 위해 조성한 주택도시기금이 고소득층에게 돌아가는 역진성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박성훈 국민의힘 의원이 한국은행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전세대출 잔액의 65.2%는 소득 상위 30% 계층이 받아 간 것으로 집계되기도 했다. 전세대출이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에 쓰인다는 지적은 그간 꾸준히 제기돼 왔던 얘기다.
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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