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여제‘ 김연경이 박혜민의 가면을 쓰고 뛰었나? ‘충무 쯔위’ 박혜민의 인생 경기...‘꼴찌’ 정관장, ‘선두’ 도로공사를 셧아웃으로 무너뜨리다 [남정훈의 오버 더 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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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여제‘ 김연경이 박혜민의 가면을 쓰고 뛰었나? ‘충무 쯔위’ 박혜민의 인생 경기...‘꼴찌’ 정관장, ‘선두’ 도로공사를 셧아웃으로 무너뜨리다 [남정훈의 오버 더 네트]
여자 프로배구 정관장의 아웃사이드 히터 박혜민(26)도 어느덧 8년차 중견의 반열에 접어들었다. 진주 선명여고를 졸업한 뒤 2018~2019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3순위로 GS칼텍스 유니폼을 입은 박혜민은 GS칼텍스에서 세 시즌을 뛴 뒤 2021~2022시즌을 앞두고 최은지(現 흥국생명)과 1대1 맞트레이드를 통해 정관장 유니폼을 입고 다섯 시즌째 뛰고 있다.

1m81의 신장은 아웃사이드 히터 포지션에서 평균 이상인데다 리시브나 수비 등 기본기도 좋은 선수라 쓰임새는 다양하지만, 8시즌 동안 풀타임 주전으로 뛴 시간보다는 교체멤버로 뛴 시간이 더 길었다. 그 이유는 공격에서의 세기가 약한 게 단점이었다. 잘 세팅된 퀵오픈은 곧잘 때리지만, 아웃사이드 히터는 리시브가 흔들리거나 수비로 걷어낸 이단연결 상황의 오픈 공격도 잘 때려내야 하는데, 박혜민은 고질적인 파워 부족으로 인해 오픈 상황에서의 해결 능력이 떨어졌다. 이런 단점을 상쇄시킬 만큼 리시브 능력이 빼어났다면 풀타임 주전 자리가 주어졌겠지만, 리시브는 평균 이상 정도라 공격력의 단점을 상쇄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배구 기량보다는 예쁘장한 외모와 걸그룹 트와이스의 멤버 쯔위를 묘하게 닮아 GS칼텍스 시절엔 ‘장충 쯔위’, 정관장 이적 후엔 홈구장인 대전 충무체육관을 붙인 ‘충무 쯔위’로 불리기도 했다.

2025~2026시즌은 박혜민에게 기회였다. 2024~2025시즌 주전 아웃사이드 히터였던 부키리치가 이탈리아리그로 떠나고, 표승주(現 KBSN 해설위원)도 코트를 떠났다. 아시아쿼터로 영입한 위파위(태국)는 무릎 부상으로 개막 후에도 개점휴업이었다. 무주공산이 된 정관장의 왼쪽 측면 두 자리 중 하나는 박혜민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이 기회도 잘 살리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공격력의 약점은 여전했고, 장점인 리시브에서도 효율이 30%를 채 넘지 못했다. 직전 시즌 챔프전에 진출했던 정관장은 아웃사이드 히터 두 자리에서의 빈 자리와 주전 세터 염혜선의 부상 공백 등이 맞물리며 최하위로 곤두박질쳤다.

그랬던 박혜민이 모처럼 ‘인생 경기’를 펼쳤다. 박혜민은 병오년 새해 첫날인 1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열린 2025~2026 V리그 여자부 4라운드 도로공사와의 홈 경기에서 선발 출장했다. 지난달 12일 페퍼저축은행전 이후 다섯 경기만의 스타팅 출전이었다. 부상 회복이 힘들어진 위파위를 내보내고 MBC 예능 ‘신인 감독 김연경’에서 성장 캐릭터로 주목받은 인쿠시(몽골)을 영입한 여파가 박혜민에게 미쳤기 때문이다. 고희진 감독은 인쿠시를 영입하자마자 아웃사이드 히터 두 자리 중 한 자리를 맡겼다.

그러나 이선우-인쿠시의 아웃사이드 히터 라인은 밸런스가 그리 좋지 못했다. 두 선수 모두 리시브나 수비보다는 공격에 방점이 찍히는 아웃사이드 히터들이었다. 두 선수 모두 상대 목적타 서브에 정신을 못차렸다. 인쿠시는 데뷔 첫 두 경기에서 한 자릿수대의 리시브 효율이란 극악의 리시브 능력을 보였다. 인쿠시 영입 후에도 정관장은 ‘승리’라는 두 글자를 가져오는 데 실패했다.

앞선 경기였던 지난달 28일 IBK기업은행전에서 경기 도중 인쿠시를 빼고 박혜민을 투입하자 정관장의 경기력은 회복됐고, 고희진 감독은 이날은 아웃사이드 히터 라인을 박혜민-인쿠시로 기용했다. 개막 후 줄곧 스타팅으로 뛰었던 이선우의 첫 벤치행이었다.

고희진 감독은 인쿠시의 아쉬운 리시브 능력을 박혜민이 보완해주길 바랬겠지만, 그렇지는 못했다. 이날 박혜민의 리시브 효율은 18.75%(4/16, 서브에이스 2개 허용)로 시즌 평균에도 못 미쳤다. 정관장에서 가장 많은 리시브를 받은 인쿠시의 리시브 효율은 무려 9.52%(4/21, 서브에이스 2개 허용)에 불과했다.

두 아웃사이드 히터의 리시브 효율이 이렇게 박살나면 응당 세트 스코어 0-3 셧아웃 패배를 당하는 양상이 많이 나온다. 게다가 상대는 3라운드까지 15승3패로 선두를 달리던 ‘최강’ 도로공사였기에 0-3 패배가 유력했다.

그러나 결과는 180도 달랐다. 정관장의 3-0 셧아웃 승리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박혜민과 인쿠시(13점, 공격 성공률 48%)가 공격에서 펄펄 날았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리시브에서 자기가 싼 X을 자기가 치웠다고 표현하면 적절할까. 특히 박혜민은 그야말로 때리는 족족 득점으로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이날 박혜민의 득점 성적표는 블로킹 3개, 서브득점 1개 포함 17점. 공격 성공률은 무려 61.9%로, 팀 내 최다득점이었다. 순도도 높았다. 공격 범실은 단 1개에 불과했고, 피블록도 없었다. 덕분에 공격 효율도 공격 성공률과 거의 비슷한 57.14%였다. 그간 단점으로 지적됐던 오픈 공격도 10개를 시도해 6개나 성공시켰다. 박혜민이 이렇게 오픈 공격을 해주니 아포짓 스파이커 자네테가 어려운 공격을 도맡을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이날 자네테는 12점을 하고도 팀 승리를 맛볼 수 있었다.

17득점은 박혜민의 커리어 기록인 18점(2022년 1월30일 VS IBK기업은행전)에 1점 모자란 수치였다. 다만 18점을 냈던 경기는 풀세트 접전이었고, 이날은 3-0 셧아웃이었으니 이날이 사실상 커리어 하이라고 봐야한다.

박혜민의 공격은 그야말로 신들린 듯 했다. 흡사 ‘배구여제’ 김연경이 박혜민의 가면을 쓰고 공격하는 느낌이었다. 박혜민의 오픈 공격은 투블로킹 사이를 교묘히 뚫거나 블로킹 옆을 지나 도로공사 코트에 꽂혔고, 블로킹을 보고 때린 공격은 바운드되어 상대가 수비할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갔다. 타이밍이 맞지 않아 어정쩡하게 페인트를 놓은 공은 라인에 절묘하게 걸쳤다. 이날 경기를 중계하던, 과거 GS칼텍스 시절 사령탑으로 박혜민을 지도했던 차상현 SBS스포츠 해설위원마저 “벤치의 코칭스태프도, 웜업존 선수들도, 심지어 공격하는 박혜민마저도 놀라고 있다”라며 극찬을 보냈다. 2세트 후반 상대 미들 블로커 김세빈의 외발 이동공격을 혼자 떠올라 ‘원맨 블로킹’ 해낸 장면은 이날 경기의 백미였다. 선두 도로공사를 3-0으로 잡고 승점 3을 챙긴 정관장은 승점 18(6승13패)로 6위 페퍼저축은행(승점 20, 7승11패)에 바짝 따라붙으며 탈꼴찌의 희망을 키울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고희진 감독으로선 아웃사이드 히터 두 자리에 대한 선택지가 넓어졌다는 게 고무적이다. 박혜민이 병오년 새해 첫날의 기세를 그대로 이어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남정훈 기자 ch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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