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자 간의 담합 행위가 적발됐을 때 과징금 상한이 현행 40억원에서 100억원으로 대폭 상향된다. 또 쿠팡·이마트 등 대형 유통업체가 대리점·납품업체 경영에 부당하게 간섭하거나, 본사가 대리점 경영에 부당하게 간섭하면 최대 50억원의 과징금이 부과된다.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30일 당정협의회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의 ‘2차 경제형벌 합리화 방안’을 발표했다. 과도한 형벌이 사업자의 경제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경영계의 지적을 일부 수용하는 대신 금전적 책임을 강화해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겠다는 취지가 담겼다.
구윤철 “과징금 대폭 강화”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 두 번째)이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경제형벌 민사책임 합리화 제2차 당정협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기업의 중대 위법행위에 대해 과징금 등 금전적 제재를 대폭 강화하겠다”며 “형벌 중심 관행에서 벗어나 시정 명령과 함께 대폭 상향된 과징금을 통해 기업 위법행위를 실효적으로 억제하겠다”고 말했다. 먼저 기업의 불공정행위 등에 대한 형벌을 줄이고 과징금 한도는 올라간다. 시장지배력이 있는 사업자가 가격을 부당하게 결정하는 시장지위 남용에 대한 과징금 한도가 기존에는 매출의 6% 또는 20억원이었지만, 매출의 20% 또는 100억원으로 강화한다. 유럽연합(EU)의 경우 관련 매출의 30% 이내에서 과징금 기본액수를 산정한 뒤 가중·감경하고, 일본은 매출의 15%까지 부과할 수 있다. 개선안이 이와 유사한 수준으로 강화되는 것이다.
대형마트나 백화점 등이 납품업자와 다른 사업자 간의 거래를 부당하게 방해하는 경우 기존에는 징역 2년에 벌금 1억5000만원이 부과됐지만, 과징금으로 전환되고 한도는 최대 50억원으로 올라간다. 단 시정명령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형벌을 부과한다.
건설사 등이 발주자로부터 선급금을 받고도 하청업체에 이를 지급하지 않을 경우 기존에는 하도급대금의 2배까지 벌금을 부과했지만, 앞으로는 최대 5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한다.
최근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동통신사 등이 위치 정보 유출 방지를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한 경우 과징금 한도가 4억원에서 20억원으로 5배 오른다. 현행 1년 이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 벌금은 폐지된다.
이 개선안에는 이재명 대통령의 의중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업무 보고에서 개인정보 유출 사고와 관련해 “위반하고도 ‘뭐 어쩔 건데’ 이런 태도를 취하는 느낌”이라며 “앞으로는 규정을 위반해 국민에게 피해를 주면 ‘회사가 망한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사업주의 행정상 단순 의무 위반에 대해서는 형벌을 과태료 전환하거나 면제해준다.
자동차제작자가 온실가스 배출허용기준 준수 여부 서류를 기한 내 제출하지 않았을 때 부과되는 벌금 300만원은 과태료 300만원으로 완화한다. 금융투자업자가 아닌데도 상호에 ‘금융투자’, ‘증권’, ‘신용보증기금’ 등의 유사명칭을 사용했을 때 징역 1년의 형벌 규정이 과태료 최대 3000만원으로 바뀐다.
동물미용업자 등이 인력 현황 변경을 제때 등록하지 않은 경우에 처하는 징역 1년의 벌칙을 폐지하고, 식품제조가공업 대표자 성명 변경을 신고하지 않은 경우의 처벌을 징역 5년에서 1년으로 줄이는 등 경미한 실수에 대해서는 형벌을 없애거나 완화한다. 캠핑카를 튜닝하고 검사받지 않으면 지금은 벌금을 부과하지만, 앞으로는 일단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제도를 바꾼다.
경제계는 당정이 마련한 2차 경제형벌 합리화 방안에 환영하는 동시에 이번 논의에서 제외된 배임죄 또한 향후 개선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경제형벌 민사책임 합리화 제2차 당정협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뉴스1 대한상공회의소는 이날 강석구 조사본부장 명의 입장문을 통해 “형벌을 금전적 책임으로 전환하고 공정거래법, 하도급법 등 그간 경제계가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온 내용이 다수 포함돼 다행으로 생각한다”며 “정부와 여당이 당초 밝힌 ‘형벌조항 1년 내 30% 개선’을 차질 없이 달성하기 위해 지금보다 과감하고 속도감 있게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는 과도한 경제형벌을 개선하기 위해 경제계 의견을 반영하고자 노력한 결과”라며 “단순 행정상 의무 위반이나 경미한 실수에 대한 사업주 형사리스크가 다소 완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정희철 한국무역협회 무역진흥본부장은 “이번 방안이 실효성 있는 입법으로 이어짐과 동시에 배임죄 개선 등 남은 과제들도 현장의 의견을 반영해 보완되기를 기대한다”고, 박양균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정책본부장은 “법률로 규정하고 있는 형벌조항의 경우 국회에서도 조속히 입법 조치가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당정은 이날 발표한 331개 규정을 개편하도록 관계 부처와 소통해 입법을 추진한다.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9월에 110개 규정을 손질하는 1차 방안을 발표한 바 있으며 앞으로 3차 개편 과제도 발굴할 계획이다.
민주당 권칠승 경제형벌민사책임합리화 태스크포스(TF) 단장은 “사회적으로 배임죄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오늘 공식 안건에는 포함되지 않았다”며 “현재 법무부를 중심으로 대체 입법안을 마련 중”이라고 말했다.
세종=권구성 기자, 이동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