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확산으로 고대역폭메모리(HBM)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반도체 업계의 병목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그래픽처리장치(GPU) 중심이던 AI 반도체 경쟁의 초점이 메모리 대역폭으로 옮겨가면서 HBM의 생산 한계가 산업 전반의 제약 요인으로 부상했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HBM 공급 차질은 급격한 수요 증가에 더해 ▲TSV(실리콘관통전극) 적층 공정 불량률 ▲발열·신호 간섭으로 인한 장시간 검증 ▲첨단 패키징 장비 확보 지연 ▲일반 D램과의 병행 생산 구조 등 복합적인 요인이 겹친 결과로 분석된다.
업황 불확실성도 변수로 작용해 일부 반도체 업체들은 추가 장비 투자를 진행하지 않고 기존 설비 내 수율(양품 비율)을 높이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업계 전반에서도 단기적 증설보다 공정 안정화에 무게를 두는 기조가 이어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현재 HBM 수요가 증가하는 속도가 일반적인 공급 증가 속도보다 빠르다"며 "HBM 자체가 다른 D램보다 다이 사이즈(반도체 1칩이 차지하는 실리콘 면적)가 2.5배 정도씩 크기 때문에 일반 D램만큼 생산 속도를 늘리려면 2.5배 생산용량을 더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HBM이 같은 생산설비를 사용하더라도 일반 D램보다 생산량이 훨씬 적다는 뜻이다. 칩 한 개가 차지하는 면적이 크기 때문에 같은 크기의 웨이퍼에서 만들 수 있는 칩 수가 줄어든다. 따라서 생산 속도를 높이려면 공장과 장비, 재료 투입을 대폭 늘려야 하며 이 과정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공급 확대에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다.
HBM은 여러 층의 실리콘을 쌓아 전기 신호를 관통시키는 TSV(실리콘관통전극) 공정으로 만들어진다. 층을 겹겹이 쌓는 과정에서 미세한 결함이 생기기 쉬워 불량률이 높아지고, 완성품의 품질을 확인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 때문에 단순히 장비를 늘린다고 해서 생산량이 그만큼 늘어나지 않는다.
최신 세대인 HBM4는 이런 공정이 한층 더 까다롭다. HBM3보다 입출력 단자가 두 배로 늘어나면서 칩 간 연결 배선이 복잡해졌고, TSV와 범프 간 간격이 좁아져 미세한 결함이 생길 가능성도 커졌다. 제조사는 불량 칩을 감안해 웨이퍼 안에 여유 공간을 확보해야 하며 그만큼 실제로 쓸 수 있는 칩 수가 줄어든다.
결국 HBM 병목의 가장 큰 원인은 급격히 늘어난 수요이지만 단순한 수요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 적층 공정의 낮은 수율과 긴 검증 절차, 생산 구조의 제약이 맞물리면서 공급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업계는 발열, 신호 간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검증 공정을 강화하고 있으나 이로 인해 생산 속도가 늦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고사양 메모리인 HBM과 함께 일반 저사양 D램 메모리 생산을 병행하는 점도 증산의 제약 요인으로 꼽힌다.
첨단 패키징 장비 확보도 또 다른 걸림돌이다. GPU는 파운드리 증설을 통해 일정 부분 수요를 흡수할 수 있지만 HBM은 TSV 적층과 첨단 패키징이 결합된 복합 공정이어서 즉각적인 생산 확대가 어렵다. 핵심 소재와 장비 공급 제약이 해소되지 않는 한 HBM 생산 능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는 단기간 내 공급 격차 해소는 어렵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AI 인프라의 병목이 GPU에서 메모리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AI 모델 학습과 추론 속도가 빨라지면서 성능의 제약 요인은 연산력보다 메모리 대역폭과 집적도로 옮겨가고 있다. 이에 연산 효율을 높이려는 기업들은 고성능 HBM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엔비디아의 차세대 GPU '블랙웰(Blackwell)'은 HBM3E를, AMD는 MI300 시리즈에 HBM3를 채택했다. 구글과 아마존 등 클라우드 사업자들도 HBM 탑재 AI칩 수요를 늘리고 있다.
국내 주요 기업들도 증설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전자는 경기도 평택캠퍼스에서, SK하이닉스는 청주 M15X 신공장에서 차세대 HBM4 양산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단기간에 공급 격차를 해소하기는 어렵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HBM은 신규 라인을 구축하더라도 장비 반입과 공정 안정화, 수율 검증까지 통상 6개월에서 1년 이상이 걸린다. 여기에 TSV·패키징 장비 확보가 제한적이어서 증설 속도에도 물리적 한계가 따른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삼성전자의 경우 HBM3E에서 수율을 좀 올려줘야 내년에 HBM4에 대해서도 안정적인 공급이 될 것으로 보인다"며 "수익성이 좋은 상황이기 때문에 수율을 높이기 위해 총력 대응을 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박준이 기자 giv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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