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만삭의 아내와 어린 딸을 태우고 차를 운전하던 남자가 개를 치는 사고를 낸다. 차에 이상이 생기자 남자는 낯선 정비소에 들어선다. 정비공 바히드는 의족을 한 그 남자의 발소리를 듣고, 그가 과거 자신을 고문한 정보관이라고 확신한다. 남자의 뒤를 쫓은 바히드는 그를 납치해 응징하려 하지만, 곧 그가 진짜 고문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남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바히드는 다른 피해자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모두 억울하게 납치·구금돼 고문당한 소시민들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모두 고문 당시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어, 누구도 남자의 정체를 확신할 수 없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그저 사고였을 뿐’은 이렇게 시작한다. 파나히는 이란 당국의 검열, 체포, 가택 연금, 출국 금지 등 지속적인 탄압 속에서 꾸준히 영화를 만든 인물. 세계 3대 영화제(칸·베니스·베를린) 최고상을 모두 받은 현존하는 유일한 감독이기도 하다. 그는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을 통해 ‘그저 사고였을 뿐’을 선보이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전날 열린 BIFF 개막식에서 그는 초대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받았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18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그저 사고였을 뿐’ 기자회견에 참석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뉴스1 18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파나히 감독은 “그 누구도 영화 제작을 막을 수는 없고, 영화 제작자들은 언제나 방법을 찾을 것”이라며 확고한 신념을 밝혔다. 그는 “이란 당국으로부터 20년간 영화 제작 금지 처분을 받았지만 집안에서 혼자서라도, 혹은 택시를 몰며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있었다”고 돌아봤다. 실제 2015년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인 그의 영화 ‘택시’에선 파나히가 직접 택시를 몰며 손님들을 맞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그는 동시대 이란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의 의미와 한계, 이란 사회의 모순에 대해 말했다.
그는 “전 세계 어디서든 정치·경제문제 등 각 사회의 문제가 있고, 영화인은 책임감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기술을 바탕으로 젊은 세대 감독들이 혁신적인 방법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당부했다.
파나히 감독은 BIFF와 오랜 인연을 맺어왔다. 첫 장편영화 ‘하얀 풍선’으로 제1회 영화제를 찾았고 이후 여러 작품을 부산에서 선보였다. 고(故)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과의 인연도 각별하다. 김 전 부집행위원장은 BIFF가 만들어지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인물로 20년 이상 부집행위원장, 수석프로그래머 등으로 활동했다. 파나히 감독은 전날 2017년 작고한 고인이 묻힌 자리를 찾아 기렸다고 한다. 그는 “이번에 한국 초청을 받고 난 뒤 제일 먼저 기억난 사람이 김지석”이라며 “내 영화들을 좋아해 주었고, 가택연금 상태의 나를 보러 이란의 집에 방문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한편 올해 신설된 BIFF 경쟁 부문 ‘부산 어워드’의 심사위원단도 이날 기자회견을 열었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나홍진 감독은 “영화제의 명성에 부합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홍콩 배우 양가휘는 “이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로 너무 흥분된다”며 “다양한 작품을 보고 세계적인 영화인들과 교류할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7인의 심사위원은 경쟁 부문에 초청된 아시아 주요 작품 14편 중 대상, 감독상, 심사위원 특별상, 배우상, 예술공헌상 5개 부문의 수상작을 선정한다.
부산=이규희 기자 lk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