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원의 쇼비즈워치] ‘첫사랑 엔딩’, 로맨스는 통한다

글자 크기
[이문원의 쇼비즈워치] ‘첫사랑 엔딩’, 로맨스는 통한다
이제 마무리된 여름 하반기 극장가는 역시 ‘좀비딸’과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의 일대 흥행으로 대변될 수 있다. 하나 더 꼽자면 개봉 후 석 달 가깝게 흥행 수위를 달리는 ‘F1 더 무비’의 끈질긴 뒷심 정도. 그러나 시선을 ‘작은 영화’로 돌리면 일본영화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와 중국영화 ‘첫사랑 엔딩’의 예상 밖 작은 성공들이 더 보인다.

전자는 여름 하반기 호러영화 공백을 치고 들어가, 10만 관객만 넘어도 성공 소릴 듣던 일본 실사영화 흐름에서 13일까지 27만1463명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했다. ‘첫사랑 엔딩’ 역시 이변에 속한다. 해외 로맨스 영화의 국내 기반이 일본영화와 대만영화로 양분되다시피 한 현실에 중국영화로서 10만 관객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13일까지 12만6058명을 동원했다.

이중 ‘첫사랑 엔딩’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지난 10년간 한국 시장에서 10만 관객을 돌파한 중국영화는 ‘첫사랑 엔딩’ 외에 몇 편이나 되는지부터 살펴보자.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을 통해 보면 단 3편만이 잡힌다. 그중 2편, 2016년 ‘매직브러시’(16만9257명)와 2018년 ‘빅샤크: 매직체인지’(13만8705명)는 애니메이션이다. 실사영화로는 2021년 첫 개봉 뒤 2023년 재개봉으로 붐을 일으킨 ‘여름날 우리’(42만4024명)가 유일하다. 역시 ‘첫사랑 엔딩’과 같은 로맨스 영화이며, 한국영화 ‘너의 결혼식’ 리메이크작으로 잘 알려졌다.

사실 ‘여름날 우리’ 흥행 당시만 해도 중국영화의 상업적 가능성이라기보다 주연을 맡은 대만배우 허광한의 티켓파워 덕이란 인상이 강했다. ‘여름날 우리’는 2021년 첫 개봉 당시만 해도 4만1138명 관객 동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허광한이 나중에 출연한 대만영화 ‘상견니’가 2023년 초 국내 개봉해 38만7574명을 동원하며 국내 스타덤에 오르는 통에 같은 해 여름 재개봉을 거쳐 흥행작으로 거듭났다. 허광한은 이후 일본-대만 합작영화 ‘청춘 18X2 너에게로 이어지는 길’까지 국내 10만 관객을 넘기는 티켓파워를 과시한다.

그리고 올해, 이렇다 하게 한국 대중에 알려진 배우도 없고 현지 개봉으로부터 꼬박 2년이나 늦깎이 개봉한 ‘첫사랑 엔딩’까지 치열한 여름 영화시장서 틈새를 찾아 괄목할 성과를 거뒀다는 것. 이쯤 되면 또 다른 화두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서로 인종과 정서가 크게 다르지 않은 동아시아 대중문화시장에서 국가 간 편견과 거부감을 최소화하며 국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코드는 바로 로맨스, 즉 ‘사랑 이야기’란 점 말이다.

당장 한국부터가 그렇게 한류를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로맨스 드라마 MBC ‘별은 내 가슴에’와 로맨스 요소가 가미된 가족드라마 MBC ‘사랑이 뭐길래’, KBS2 ‘목욕탕집 남자들’ 등이 중화권서 연이어 성공하며 탄생한 용어가 ‘한류’다. 일본 한류 본격화 역시 KBS2 로맨스 드라마 ‘겨울연가’가 2004년 일본 NHK를 통해 방영되면서부터. 해외시장 전략에서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늘 최선봉으로 침투해 타 문화에의 편견과 거부감을 무력화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 직후 일본 콘텐츠에 대한 거부감이 극심하던 때 일본영화로서 처음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분위기를 전환한 게 이와이 ?지 감독의 로맨스 영화 ‘러브레터’다. 반일(反日) 감정 기반으로 국내 흥행에 성공한 2006년 ‘일본침몰’ 이후 일본 실사영화로서 11년 만에 다시 40만 이상 관객을 끌어모은 것도 로맨스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2001년의 ‘주온’ 이후 무려 21년 만에 다시 100만 관객을 넘어선 일본 실사영화 역시 로맨스 영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다.

대만영화도 마찬가지. 대중적으론 홍콩영화와 대만영화를 제대로 구분하지도 못하던 시절 대만영화의 남다른 존재감을 알린 게 2008년 국내 개봉한 로맨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이다. 15만7539명을 동원하며 당시로서 대만영화 국내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다. 이어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나의 소녀시대’ ‘장난스런 키스’ ‘상견니’ 등의 성공이 계속되며 비로소 ‘대만영화=청춘 로맨스 영화’로서 특화되기에 이른다.

그런 점에서 지난 십수 년 래 중국영화의 한국시장 두드리기는 방향이 크게 잘못돼있었단 인상이다. 한국 수입사 측 판단 미스일 듯하지만, 전반적으로 한국시장에 먹힐 콘텐츠를 먹힐 방식으로 마케팅하지 않고 거의 반대 방향으로 갔단 인상까지 든다. 한 마디로 중국서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고 해외에서도 성공 가능성이 높을 리 없고, 중국서 해외에 자랑하거나 알리고 싶은 콘텐츠는 사실 전형적인 내수용 콘텐츠일 가능성이 높단 얘기.

이런 현실인데 ‘전랑’이나 ‘유랑지구’ 같은 애국주의 프로파간다나 시각효과를 앞세운 판타지 블록버스터 중심으로 해외에 들이밀어지니 될 일도 없고 오히려 거부감만 가중된다. 프로파간다는 애초 가망성 없다손 치고, 기술과 규모의 블록버스터 승부 역시 해외 각국은 이미 할리우드 콘텐츠란 넉넉한 대안을 갖고 있다. 그러니 프랑스 ‘아스테릭스’ 프랜차이즈나 일본의 수많은 만화 실사화 블록버스터 등도 다른 나라에선 별 힘을 못 쓴 것이다. 미국을 제외한 국가들에선 그런 게 아니라 문화 교류 근간인 정서의 교류, 즉 가지각색 인간 감정의 보편성 기반으로 각기 다른 환경과 관습 속에서도 서로 공감할 정서 지점들을 제시하는 게 먼저다.

돌이켜보면 1970년대 중후반부터 1990년대 초중반까지 한국을 비롯 아시아 전역을 강타했던 홍콩영화 신화도 비단 왕우와 이소룡, 성룡, 주윤발 등의 화려한 액션 블록버스터들이 이뤄낸 신화만은 아니었다. 특히 한국의 경우 1970년대 ‘스잔나’, 1980년대 ‘가을날의 동화’, 1990년대 ‘첨밀밀’과 왕가위 영화 등 로맨스 영화들이 사이사이로 그곳의 ‘사람’을 알리며 정서적 유대감을 확인시켰기에 얻어진 친밀감과 신뢰감, 애착이었다고 볼 만하다.

마침 2~3년 전부터 중국서도 애국주의 블록버스터 열기가 한풀 꺾이고 있단 보도다. 지난해 연간 흥행 1위도 일본영화 ‘백엔의 사랑’을 리메이크한 ‘맵고 뜨겁게’였고, 2위는 레이싱 코미디 ‘페가수스 2’, 3위가 중국 사회문제인 ‘소황제’ 육아의 정반대, 소위 ‘빈곤 교육’으로 자식을 바람직하게 키운단 드라마 ‘석세서’였다. 중국 영화산업도 점차 분위기가 바뀌어 간단 얘기다. 소리 소문 없이 국내 상륙한 ‘첫사랑 엔딩’의 작은 성공에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이유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HOT 포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