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배구 V리그에는 전통이 하나 있다. 시즌 개막전은 이전 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맞붙은 두 팀이 치른다. 장소는 챔피언결정전 우승팀의 홈구장. 아울러 개막전은 홈팬들이 직관하기에 상대적으로 더 편리하고, 전년도 우승팀이 성대한 이벤트 속에 치를 수 있게 주말 첫 머리인 토요일에 배치한다. 다음달 18일 토요일에 개막하는 2025~2026 V리그의 남자부 개막전 매치업은 2024~2025시즌 챔피언결정전 우승팀인 현대캐피탈과 준우승팀 대한항공, 여자부는 흥국생명과 정관장이 맞붙을 예정이‘었’다. 장소는 현대캐피탈과 흥국생명의 홈인 천안 유관순체육관,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이다.
그러나 남자부 개막전은 다음달 18일 치러질 수 없게 됐다. 국제배구연맹(FIVB)이 지정한 남자부 2025~2026 클럽 시즌(Club Season)이 다음달 20일부터라 일정 위반으로 치러질 수 없는 상황이 생겼기 때문이다. 사연은 이렇다. 필리핀에서 열리는 2025 세계배구선수권 남자대회가 12일 개막해 28일까지 치러진다. 그로부터 정확히 3주간의 휴식기가 주어지고, FIVB가 지정한 클럽 시즌은 다음달 20일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한국배구연맹(KOVO)은 이러한 클럽 시즌 일정을 미처 고려하지 못한 채 2025~2026시즌 개막 날짜를 10월18일로 확정했다. 딱 이틀이 FIVB가 지정한 휴식기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다만 여자부는 18일에 개막전을 치를 수 있다. 태국에서 열린 2025 세계선수권 여자대회가 지난달 22일 시작해 7일 막을 내렸고, 4주간의 휴식기를 거쳐 다음달 6일부터 2025~2026 클럽 시즌(Club Season)이 시작되기 때문에 18일부터 개막전을 치르는 데 하등 문제가 없다.
FIVB는 2025년부터 2028년까지 대표팀 시즌, 클럽 시즌 등을 담아 발표한 것은 지난해 말이었다. 그리고 KOVO가 2025~2026시즌의 개막 날짜 및 시즌 일정의 가안을 만든 것도 지난해 말. 선후 관계가 명확치는 않으나 미처 FIVB의 일정표를 체크하지 못한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배구계에 따르면 FIVB의 클럽 시즌 일정은 강제사항이다. 과거만 해도 FIVB가 지정한 클럽 시즌 일정에 각국 리그의 개막일이 살짝 위배되더라도 각국 리그 실정에 따라 유연하게 넘어가기도 했다. 2년 전에도 이런 문제가 불거지긴 했지만, 별다른 잡음없이 넘어갔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브라질 출신의 파비우 아제베두가 FIVB 회장으로 선출된 이후 각국 리그에 대한 FIVB의 ‘그립감’이 강화됐다. 이 때문에 클럽 시즌 일정은 꼭 지켜야 하는 강제규제가 됐다. 유럽의 손꼽히는 배구 강국인 이탈리아도 FIVB의 클럽 시즌 일정보다 앞서 자국리그를 개막하려 했으나 결국 일정을 지키는 방향으로 재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SV리그는 FIVB 클럽 시즌 일정에 따라 25일 개막을 확정지었다.
최근 이러한 문제가 불거지자 KOVO는 FIVB에 두 차례나 서한을 보냈다. ‘이미 리그 일정이 확정되었고, 다음달 18일에 리그를 시작해 내년 4월 초에 포스트시즌 일정을 끝내야만 시즌 전 경기가 생중계로 방송될 수 있다’ 등의 사정을 담아 대한배구협회를 통해 간곡히 호소했지만, FIVB는 “한국의 사정을 봐줄 경우 각국 리그에서 저마다 사정을 들어 일정을 지키지 않으려 들 것이다”라는 단호한 입장을 전해왔다. 결국 KOVO는 남자부 일정을 20일부터 시작하기로 일정을 재배치하기로 했다. 개막전 다음날인 다음달 19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삼성화재와 OK저축은행의 경기는 당초 예정일이었던 21일 화요일에 평성하기로 해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가 된 건 18일 열리는 현대캐피탈과 대한항공의 시즌 개막전. 이 일정을 다시 포함해 새롭게 시즌 일정을 짜기는 곤란했다. 각 구단들이 이미 발표된 일정에 따라 홈구장 대관 절차를 다 마쳐놓은 상황이다. 일정을 조정하면 대관 절차를 또 거쳐야 하는 등의 7개 구단 전체가 번거로워진다. 서울 장충체육관처럼 프로배구뿐만 아니라 콘서트나 다양한 수익 행사를 치르는 인기 체육관은 새롭게 짠 일정에 따라 다시 대관 예약을 잡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각 구단들은 이미 발표된 일정에 따라 원정 숙소 예약 등도 마쳐놓아 이를 조정할 경우 위약금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지난 10일 KOVO에서 남자부 각 구단 사무국장들이 모여 실무위원회를 개최했고, 논의 끝에 현대캐피탈과 대한항공의 개막전이자 1라운드 맞대결은 6라운드 일정을 모두 마친 이후인 내년 3월19일에 치르기로 결정했다. 현대캐피탈이 대승적인 차원에서 이전 시즌 우승팀의 가장 큰 특권인 시즌 개막전 개최를 포기하기로 양보하면서 극적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다만 한 경기를 시즌 맨 뒤에 붙이는 것만으론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산적해 있다. 당장 현대캐피탈과 대한항공 선수들은 1라운드에서 다른 팀들과 달리 5경기만 치르기 때문에 라운드 MVP 선정 등에서 손해를 볼 수도 있다. 게다가 강력한 우승후보인 두 팀은 다른 팀들에 비해 최대 2경기를 덜 하는 상황까지 생긴다. 시즌을 순조롭게 치르고 있는데도 부족한 경기 수로 인해 승점 차가 생겨 순위가 2,3위로 밀리는 상황도 생길 수 있다. 자연스레 기사 제목에서도 ‘선두’, ‘1위’ 이런 수식어를 받지 못하는 무형의 손해까지도 있다. 남정훈 기자 ch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