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 언론의 첫 번째 기준은 기본원칙과 상식이다. 계엄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존립의 위기에서만 허용되는 최후의 수단이다. 일상의 정치적 갈등이나 권력의 교착, 지지율의 흔들림은 계엄의 사유가 될 수 없다. 헌법은 권력을 부여하되, 그 사용 조건과 한계를 분명히 정해 두었다. 그 선을 넘는 순간, 권력은 통치가 아니라 폭주가 된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군과 경찰을 동원하려 했다는 혐의는, 사실 여부를 떠나 상식의 언어로 이미 납득하기 어렵다. 상식은 묻는다. 왜 대화와 절차 대신 비상권력이었는가.
진리·정의·자유를 추구하는 언론의 관점에서 이번 구형은 민주주의의 자기방어 능력을 가늠하는 시험대다. 자유는 무제한이 아니며, 정의는 절차 위에 서야 한다. 국가긴급권은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제한하는 장치이지, 권력을 연장하기 위한 지름길이 아니다. 사형 구형이 지닌 상징성은 민주주의가 스스로의 위협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여준다. 처벌은 복수가 아니라 경고여야 한다. 다시는 헌정질서를 사유화하지 말라는, 공직 엘리트 전체를 향한 경고다.
해외 사례는 이 질문을 더욱 선명하게 한다.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말년에는 국제사회와 자국 사법의 추궁을 피하지 못했다. 스페인은 1981년 군부 쿠데타 시도 당시 국왕이 헌법 수호를 선언함으로써 사태를 봉합했고, 이후 군의 정치 개입에 단호한 선을 그었다. 미국 역시 2021년 의사당 난입 사태 이후 전직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를 포함한 책임자들을 사법의 장으로 불러냈다. 제도의 성숙도는 위기에서 드러난다. 민주국가들은 공통적으로 군의 정치적 중립과 헌법의 최상위성을 지켜왔다.
인간·문화·자연을 존중하는 경영과 언론의 시각에서 보면, 계엄의 그림자는 사회 전반에 깊게 드리운다. 군의 중립성은 훼손되고, 시민의 일상은 불안에 흔들리며, 경제와 문화의 신뢰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투자와 교류는 불확실성을 가장 경계한다. 자유로운 토론과 창작의 토양은 위축되고, 그 회복에는 자연처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피해는 숫자로 온전히 환산되지 않는다. 그래서 상식의 기준은 더욱 엄격해야 한다.
이번 사형 구형을 둘러싼 논쟁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도덕과 양심의 문제다. 법리는 냉정해야 하지만, 법을 집행하는 주체의 양심은 뜨거워야 한다. 권력자의 판단 하나가 공동체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자각, 그 자각이 결여될 때 민주주의는 가장 취약해진다. 반성 없는 권력, 책임 없는 설명은 같은 오류를 반복하게 만든다.
물론 사형이라는 형벌 자체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별도로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의 핵심은 집행의 문제가 아니라 기준의 문제다. 어디까지가 허용되고, 어디서부터는 불가한가. 정치가 절차를 배반할 때 사법은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기본원칙과 상식의 법정에서 이번 구형은 그 기준을 분명히 하려는 시도다.
대한민국은 이제 성장의 속도가 아니라 성숙의 깊이로 평가받는 나라다. 계엄을 정치의 수단으로 상상하는 순간, 우리는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권력의 편의에 기대는 체제로 퇴행한다. 진리와 정의, 자유는 선언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인간과 문화, 자연의 삶의 조건 역시 헌법적 절제가 무너질 때 가장 먼저 파괴된다. 그래서 비상권력은 언제나 권력자의 손이 아니라 상식의 법정에 먼저 세워져야 한다. 이번 사형 구형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헌정질서를 흔드는 판단 앞에서, 누구도 직위나 명분으로 면책될 수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관용으로 유지되지만, 원칙을 넘는 순간에는 단호함으로 스스로를 지킨다. 이것이 오늘 대한민국이 스스로에게 요구해야 할 최소한의 성숙이다.
2024년 12월3일 비상계엄 선포 속보 [사진=연합뉴스] 아브라함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