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사설 | 기본·원칙·상식] 침묵이 죄가 되는 순간, 통합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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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사설 | 기본·원칙·상식] 침묵이 죄가 되는 순간, 통합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와 종교계가 ‘종교계 국민통합 실천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번 선언에는 불교·개신교·천주교·유교·원불교·천도교·성공회 등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7대 종단과 한국교회총연합이 공동명의로 참여했다. 교리와 역사, 사회적 배경이 서로 다른 종단들이 한목소리를 냈다는 사실 자체가, 오늘의 한국 사회가 처한 분열의 현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선언의 요지는 분명하다. 차이를 지우지 않되, 차이 위에서 공동체를 지키겠다는 약속이다. 총 7개 항으로 구성된 선언문은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와 헌법이 수호하는 사회 정의가 위협받을 경우, 종교적 양심에 따라 연대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종교 간 화합을 넘어, 종교가 다시 공적 책임의 영역으로 들어오겠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특히 이번 선언은 각 종단의 고유한 전통이 공통의 원칙 위에서 만났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불교의 수행과 자비, 개신교와 천주교의 사회참여 전통, 유교의 공공 윤리, 원불교의 생활 속 실천성, 천도교의 민족·민주 정신, 성공회의 중재와 화해의 역할이 하나의 문장 안에 담겼다. 차이를 덮는 방식이 아니라, 정체성을 유지한 채 최소한의 공통 원칙에 합의했다는 점에서 이번 선언은 이전과 결이 다르다.

역사는 종교의 선택이 사회의 방향을 바꾼 사례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독일에서 교회가 나치 체제 초기 ‘정교 분리’를 이유로 침묵했을 때, 그 침묵은 결과적으로 비극의 일부가 됐다. 반대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성공회 주교 데스먼드 투투가 종교적 양심으로 인종차별에 맞섰고, 종교는 분열된 사회를 회복으로 이끄는 도덕적 축이 됐다. 종교가 침묵할 때 사회는 더 거칠어졌고, 종교가 나설 때 공동체는 치유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번 선언은 각 종교의 핵심 가르침과도 맞닿아 있다.
부처는 “미움은 미움으로써 그칠 수 없고, 자비로써만 그친다”고 했다.
예수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며 사회의 부패를 막는 책임을 일깨웠다.
공자는 “의를 보고 행하지 않으면 용기가 없다”고 했다.
표현과 언어는 달라도,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말라는 요구만큼은 동일하다.

이번 공동선언이 성사된 배경에는 이석연 국민통합위원장이 취임 이후 각 종단 대표를 직접 만나 종교의 사회적 역할을 꾸준히 요청해 온 과정이 있다. 통합은 단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신뢰를 쌓고, 공통의 언어를 찾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제 관건은 실천이다. 국민은 더 이상 선언문 그 자체에 감동하지 않는다. 갈등의 현장에서 종교가 어떤 언어를 선택하는지, 정치적 압박 앞에서도 원칙을 지키는지, 약자의 상처를 실제로 보듬는지가 선언의 진정성을 가를 것이다.

통합은 모두를 만족시키는 상태가 아니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선택이다. 불교·개신교·천주교·유교·원불교·천도교·성공회가 함께 내놓은 이번 약속이 선언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정의가 위협받는 순간 침묵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야말로, 지금 한국 사회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통합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사진아주경제 DB[사진=아주경제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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