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자의 지위 [유선아의 취미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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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의 지위 [유선아의 취미는 영화]
새해 첫날 게재될 이 글을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쓴다. 지난달 25일은 말을 제법 할 줄 알게 된 조카가 맞이하는 첫 크리스마스였다. 다 같이 모인 가족 중 가장 늦게 일어나 접한 것은 간밤에 산타가 와서 잠든 조카를 보고 선물을 두고 갔다는 어른들의 거짓말과 그 거짓말을 뒷받침하는 인공지능(AI) 영상이었다. 곤히 자는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는 산타 영상을 보고 순간 속아 넘어갈 뻔했다. ‘아바타: 불과 재’ 기자 시사회에서 본편 상영에 앞서 ‘생성형 AI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메시지가 먼저 전해진다. 배우의 실제 움직임에 컴퓨터 그래픽을 더해 나비족을 창조해 낸 그가 카메라 앞에 존재한 적 없는 원본 없는 영상은 진정한 영화의 이미지가 아님을 말한 것이다. 생성형 AI가 영화 산업 안에서 거부할 수 없는 물살이 되어버린 현재 그의 말은 이미지의 위계질서를 재배치하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저작권과 제작 의도 등의 윤리를 잠시 옆으로 밀어두면 컴퓨터 그래픽과 AI 영상의 위계는 그것이 믿을 법한가에 답하는 현실의 모사성에 달려 있다. 이탈리안 브레인롯은 사물과 생물이 조악하게 혼합되었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AI의 결과물로 보인다. 알파 세대의 유희 정도로 치부되는 이유다.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현을 덮친 쓰나미가 뉴스에서 반복 송출되는 동안 누구도 압도적이고 파괴적인 자연재해의 진위를 의심하지 않았다. 반면 지난해 12월 아오모리현에서 7.5도 규모의 강진이 보도되면서 AI로 만든 가짜 영상을 주의하라는 내용이 함께 이어졌다. 현실과 현실 같은 이미지의 위계는 영화보다 일상에서 먼저 더욱 심각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회화 이후 사진과 영화가 발명되면서 인간의 오감 중에서 ‘본다’는 행위는 그 어느 때보다 바로 지금 가장 우선시된다. 그렇다면 목격자이자 관객인 우리의 지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롤랑 바르트의 말을 빌리면 사진의 본질은 그 대상이 ‘거기 존재했음’에 있다. 필름에서 디지털 영화로 그 형태가 바뀌었어도 본다는 것은 언제나 존재와 부재의 확인이라는 양가성을 수반한다. 영화를 보고 듣는 동안에 다른 감각은 잊히고 우리는 어느새 사유와 기억으로 내던져진다. 그러니 영화를 관람한다는 것 또한 기억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것에 가깝다. 체험 영화가 쏟아져 나온대도 한 편의 신작이 새로운 감각 경험으로 각인될 리 없다. 몇 해 전 한강의 소풍객이 태블릿에 띄워 놓은 모닥불이 잊히지 않는다. 불의 모든 본질인 열기와 위험함, 연소되는 동안 일렁이는 주변 공기, 나무 타는 냄새가 모두 사라진 명멸하는 픽셀에서 그 소풍객 무리는 불에 대한 각자의 기억을 되살렸을 것이다. 실재했음을 약속하는 영상-이미지와 목격 사이의 신뢰는 AI로 인해 더는 유효하지 않다. 우리, 목격자는 수많은 것을 보았다고 믿으면서 앞으로 무엇을 잃고 무엇을 구하게 될까.

유선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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