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원성윤 기자] 만약 벽돌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뉴욕 맨해튼 23번가에 위치한 이 붉은색 빅토리아 고딕 양식의 건물은 아마도 인류 근대 예술사의 절반을 읊어낼지도 모른다. 호화로운 샹들리에나 최고급 린넨 시트 때문이 아니다. 이곳은 20세기 문화 예술계의 가장 엉뚱하고 반항적이며, 천재적인 영혼들이 모여들었던 거대한 합숙소이자 그들의 ‘집’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호텔 첼시(Hotel Chelsea)’ 이야기다.
1883년 완공 당시 뉴욕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첼시는 1905년 호텔로 용도를 변경한 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티스트들의 성지(聖地)로 군림했다. 런던의 사보이 호텔이 귀족적인 럭셔리함을 팔았다면, 뉴욕의 첼시 호텔은 ‘관용’과 ‘영감’을 팔았다.
호텔 첼시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 이곳은 단순한 숙박 시설이 아니었다. 당시 호텔 매니저였던 스탠리 바드(Stanley Bard)는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기꺼이 방을 내주었다. 방세가 밀리면 그림이나 노래로 대신 받기도 했다. 이러한 파격적인 운영 철학은 첼시를 자본주의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 맨해튼의 유일한 해방구로 만들었다. 예술가들은 로비에 모여 앉아 밤새 토론했고, 옆방의 소음은 소음이 아닌 영감의 교류였다.
이 붉은 벽돌 안에서 벌어진 일들은 그대로 전설이 되었다. 포크 록의 아이콘 밥 딜런(Bob Dylan)은 이곳 211호에 머물며 자신의 아내를 위한 곡 ‘Sad-Eyed Lady of the Lowlands’를 밤새워 써 내려갔다. 그는 첼시에서의 날들을 “끝없이 이어지는 파티와 같았다”고 회고했다.
팝아트의 교황 앤디 워홀(Andy Warhol)은 아예 이곳을 자신의 촬영 스튜디오로 삼았다. 그의 대표적인 실험 영화 ‘첼시 걸즈(Chelsea Girls, 1966)’는 호텔의 각기 다른 방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을 담아낸, 호텔 그 자체가 주인공인 작품이다. 워홀의 뮤즈였던 에디 세즈윅이 복도를 활보하고,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멤버들이 로비에서 담배 연기를 내뿜던 시절, 첼시는 뉴욕 팝아트와 아방가르드 문화의 심장이었다.
무엇보다 호텔 첼시를 가장 애틋하게 추억하게 만드는 이는 ‘펑크의 대모’ 패티 스미스(Patti Smith)다. 그녀는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와 함께 이곳 1017호에서 가장 가난하지만 가장 빛나던 청춘을 보냈다. 그녀의 회고록 ‘저스트 키즈(Just Kids)’에는 첼시 호텔 로비에 들어서면 “나쁜 짓을 꾸미는 녀석이나, 쩐에 쪼들리는 천재들이 득실거렸다”는 묘사가 나온다. 그녀에게 첼시는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서로의 꿈밖에 없었던 시절”을 지켜준 든든한 요람이었다.
물론 첼시에는 낭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곳은 비극과 타락의 무대이기도 했다. 시인 딜런 토머스가 과음으로 쓰러져 죽음의 문턱을 넘은 곳이자, 섹스 피스톨즈의 시드 비셔스가 여자친구 낸시 스펑겐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어두운 역사조차 첼시가 가진 ‘데카당스(퇴폐미)’의 일부가 되어 예술가들을 끌어당기는 자력이 되었다.
호텔 첼시는 오랜 리노베이션을 거쳐 최근 다시 문을 열었다. 낡은 배관을 뜯어내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덧입혔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깨끗한 침구보다는 삐그덕거리는 복도에서 밥 딜런의 기타 소리와 앤디 워홀의 웃음소리를 찾는다.
호텔의 본질은 ‘환대(Hospitality)’다. 오늘날의 특급 호텔들이 웰컴 드링크와 최첨단 시설로 고객을 환대한다면, 호텔 첼시는 갈 곳 없는 영혼들에게 “너의 예술을 마음껏 펼치라”는 자유의 공간을 내어줌으로써 최고의 환대를 베풀었다.
AI와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2025년의 차가운 도시 풍경 속에서, 가난한 천재들의 월세를 그림 한 점으로 탕감해 주던 첼시의 낭만이 유독 그리워진다. 어쩌면 우리가 호텔에서 진정으로 얻고 싶은 것은 하룻밤의 안락함이 아니라, 내 안의 무언가가 깨어나는 영감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1960년대의 그들처럼 말이다. socool@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 연재기획: 원성윤의 호텔의 역사]
①모네의 캔버스, 처칠의 아지트…‘사보이’는 어떻게 전설이 됐나
②110년의 증인, 환구단 맞은편 ‘최초의 럭셔리’ 조선호텔
③샤넬이 30년간 ‘집’이라 부른 곳…리츠 파리, 럭셔리의 역사를 쓰다
④아차산 자락에 핀 ‘동양의 라스베이거스’, 워커힐의 반세기
⑤엄격한 싱가포르서 유일하게 쓰레기 투기 허용된 곳…‘슬링’의 전설 래플스
⑥장동건·김연아 이어 김우빈·신민아까지…‘세기의 결혼’ 완성한 그곳, 신라호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