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연립정부가 징병제 재도입의 전 단계로 볼 수 있는 새로운 병역 제도를 내놓았다. 독일은 향후 몇 년 안에 독일군을 유럽연합(EU) 회원국 군대 가운데 가장 강한 재래식(conventional) 군대로 만든다는 방침이다.
여기서 굳이 ‘재래식’이란 표현을 쓴 것은 EU 회원국 중 유일한 핵무기 보유국인 프랑스 군대를 능가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전제를 의식한 조치로 풀이된다.
독일 육군의 행진 모습. 독일 정부는 병역 제도 개편을 통해 현재 18만2000명인 독일군 병력 규모를 향후 10년 안에 26만명까지 증강한다는 방침이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13일(현지시간) BBC 방송에 따르면 보수 성향의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 연합과 진보 성향의 사회민주당(SPD)으로 구성된 연정은 수개월에 걸친 격렬한 논쟁을 끝내고 새 병역 제도 도입에 합의했다. 유럽이 당면한 심각한 안보 위기를 들어 징병제 재도입을 주장해 온 CDU·CSU 연합과 ‘징병제는 안 된다’는 원칙론을 견지해 온 SPD 간에 절충이 이뤄진 결과다. 새 병역 제도는 2026년부터 18세가 되는 남녀 모두에게 군 복무에 대한 관심과 의지를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하는 것이 핵심이다. 남성은 본인 뜻과 무관하게 의무적으로 답안지를 만들어 정부 당국에 제출해야 한다. 여성은 본인이 원하는 경우에만 답안지를 작성하면 된다.
2027년 7월부터는 18세가 되는 남성 전원이 의무적으로 건강 검진을 받아야 한다. 사실상의 병역판정검사(일명 ‘신체검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과연 군 복무를 감당할 수 있는 몸 상태인지 정밀하게 확인한다.
새로운 제도의 시행으로 독일은 현재 약 18만2000명에 불과한 병력 규모를 향후 10년 안에 25만5000∼26만명까지 늘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만약 병력 증가 속도가 예상에 못 치거나 독일이 전쟁이 휘말린다면 그때는 징병제를 도입할 수 있다.
독일의 이 같은 새 병역 제도는 현행 모병제의 기본 틀을 유지하되 유사시 언제든 징병제로 전환할 수 있는 일종의 과도기 시스템이란 평가를 받는다. 징병제에 부정적인 SPD 등 진보 진영의 우려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안보 강화도 병행하겠다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13일(현지시간)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연립여당인 CDU·CSU 연합과 SPD 간의 정책 협의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연립여당 가운데 CDU를 이끄는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지난 7월 독일의 나토 가입 70주년 기념식에서 최근 독일이 국방비를 대폭 증액한 사실을 거론하며 “이러한 자원을 토대로 향후 몇 년 안에 독일군을 EU에서 가장 강력한 재래식 군대로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독일의 강한 군사력은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를 돕는 데에도 쓰일 것이란 점을 명백히 한 메르츠는 “정의로운 평화로 가는 것은 오로지 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흑역사’ 탓에 독일 국민은 국방력 강화에 소극적 태도를 취했다. 다만 냉전 시기 동·서독으로 분단된 독일은 미군이 서독, 소련(현 러시아) 군대가 동독에 각각 대규모로 주둔하며 한반도와 더불어 세계에서 군사적 긴장이 가장 고조된 지역으로 꼽혔다. 동·서독 모두 징병제를 통해 강한 군대를 육성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90년 공산주의 동독 정권의 붕괴로 독일은 통일을 이뤘다. 이후 소련 해체와 냉전 종식을 거치며 20년 넘게 평화가 지속되자 독일은 군대 규모와 국방 예산을 줄였다. 2011년에는 징병제마저 폐지했다. 하지만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안보 위기감이 커지며 국방부 지출을 늘림은 물론 병력 증강에도 나섰다. 다만 현 모병제 아래에서 병력 증강이 한계에 부딪히자 정부는 징병제 재도입 등 여러 선택지를 놓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왔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