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매운맛 중독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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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매운맛 중독 시대


“세상의 그 많은 고추는 새가 퍼트렸다. 고추는 제멋대로 스스로를 맵게 해 동물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했으나 새들은 매운맛을 즐겼다. 즐겼다기보다는 미각이 둔한 탓이라 해야 옳겠지만, 남미 고추가 전 세계로 퍼지게 된 이유는 새들의 부지런함과 자극을 즐기는 사람의 혀 덕분이다. ”


명지현 작가의 ‘교군의 맛'은 입 안에 침이 가득 고이는 소설이다. ‘교군’이라는 음식점을 배경으로 삼대 여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풀어낸 이 소설은 매운맛에 대한 칼칼한 묘사가 한국인의 ‘맵부심(매운맛 자부심)’을 제대로 자극한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매운맛을 즐긴다. 김치부터 떡볶이, 매운탕까지 한국인의 밥상은 대부분 새빨간색이다. 소설에서 소개한 것처럼 매운맛을 내는 고추의 원산지는 멕시코다. 15세기부터 시작된 대항해 시대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적도 부근의 멕시코에서 발견한 고추를 유럽으로 가져오면서 전 세계로 전파됐다. 우리나라는 16세기 임진왜란을 전후로 고추가 유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왜란 당시 일본군이 가져왔다는 설과 그 이전부터 중국에서 들어와 재배했다는 주장이 맞선다.


고추가 본격적으로 한국인 밥상에 등장한 것은 조선 후기인 18세기부터로 전해지는데, 1950년대 6.25전쟁 이후 한국 음식에 고추가루 사용이 급증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최단 기간 경제 성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발생한 스트레스를 풀었던 매운맛이 한국 음식을 대표하는 정체성이 된 것이다.


매운맛은 최근 수년간 한국을 넘어 전 세계인의 입맛까지 사로잡고 있다. K-매운맛의 대표주자인 삼양식품의 불닭볶음면은 지난해 해외 수출만 1조3000억원을 넘어섰다. 2013년 출시된 불닭볶음면은 2016년 '불닭 챌린지' 열풍이 불면서 미국내 아시아계를 중심으로 수요가 늘기 시작했는데, 지난해 폭발적으로 해외 수출이 증가했다. 올해 상반기 기준 삼양식품의 라면 수출은 8350억원 규모로, 이미 지난해 연간실적의 60%를 넘어섰다. 특히 미주지역은 2023년 수출 비중이 20%에 그쳤지만, 지난해 30%로 확대되며 최대 수출 지역이 됐다.


매운맛은 통각으로 알려졌다. 짠맛과 쓴맛, 신맛, 단맛, 감칠맛을 느끼는 미각과 달리, 온도를 감지하는 'TRPV1' 수용체가 매운맛 성분을 43℃ 이상이 고온으로 느끼는데, 이런 감각은 뇌에 통증으로 전달된다. 매운 음식을 잘 먹는 ‘맵부심’들은 이 수용체가 부족해서다. 매운 음식이 들어가면 인간의 뇌는 화상을 입었다고 판단, 엔도르핀이라는 진통 효과를 내는 물질을 분비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한다. 스트레스가 쌓일 때마다 매운맛 음식을 다시 찾게되는 이유이다.


최근 글로벌을 강타한 K매운맛 열풍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신종 감염병인 코로나19는 생존를 위협했고, 펜데믹을 거치는 동안 벌어진 '두 개의 전쟁(우크라이나-러시아, 이스라엘-하마스)'을 통해 생명의 나약함을 목도했다. 여기에 비약적인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은 그동안 밥벌이에 활용한 인류의 지식이 무용지물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키웠다. 무엇보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글로벌 경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전 세계가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스트레스다.


매운맛은 우리 몸이 자극을 주는 호르몬을 분비하기 위해 찾는다는 점에서 중독성이 강하다. K-매운맛이 반짝 흥행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다행이지만, 남은 인생은 매순간 매콤한 마약이 필요할 것 같아 벌써부터 얼얼하다.






지연진 기자 gy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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