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SK이노베이션 울산콤플렉스(울산CLX) 정문 앞. 녹슨 관과 콘크리트 구조물이 얽힌 공장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1971년 가동을 시작한 국내 최초 나프타분해시설(NCC) 1공장이다. SK지오센트릭이 2020년 20만t 규모의 이 설비를 멈춘 지 벌써 5년째, 부지에는 '접근금지' 표지만 덩그러니 붙어 있었다. 회사 관계자는 "철거 비용을 추산해보니 수백억원이 든다"며 "대체 설비를 넣을 계획이 있어야 철거비를 쓰는데 지금은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과거엔 노후 설비를 교체할 새로운 생산 아이템이 있었는데, 석유화학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기존 설비를 대체할만한 사업이 더 이상 없다는 의미로 읽혔다.
이날 찾은 울산 석유화학단지에선 정부의 자율 구조조정 방침에 불만의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 최근 산업통상자원부는 전국 NCC의 에틸렌 연간 생산규모를 최대 370만t까지 업계 자율로 줄이라는 방침을 내놨는데, 현장에선 "산단별 분담 비율이라도 제시할 줄 알았다"는 반응이 나왔다. 어느 산단에서 얼마를 줄일지 기준을 정하지 못하자 업계는 눈치를 보고 있다.
NCC는 에틸렌 등 기초유분을 생산하지만 보관과 운송이 어려운 만큼 산업단지 단위로는 거점을 유지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또 정유·화학 계열사와 얽힌 밸류체인 구조상 한 곳이 빠지면 공급 구조를 재편해야 한다. 다만 산단별 특성 차이가 변수다. 일부는 계열사 수직계열화를 통해 다운스트림 공정까지 이어지지만, 어떤 곳은 타사 공급 비중이 크다. 효율성과 수요 구조가 제각각인 만큼 어떤 단지가 얼마만큼 감축을 부담할지 세밀한 조율이 불가피하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울산석화단지의 가장 큰 불만은 전남 여수, 충남 대산을 포함한 3개 석화단지 가운데 가동률이 가장 높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올해 상반기 기준 SK지오센트릭은 100%, 대한유화는 95% 이상이다. 생산되는 에틸렌은 모두 다운스트림(합성수지·고무 등 후방공정) 가동에 투입되고 있다. 한국화학산업협회에 따르면 최근 3년간 NCC 가동률은 대산이 70.0%, 여수는 80% 정도로 업계 손익분기점인 85%를 밑돌았다. 반면 울산은 같은 기간 90%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SK지오센트릭 관계자는 "NCC만 떼어놓으면 적자지만 수직계열화 설비를 바탕으로 다운스트림 수요에 맞춰 최적화했다"고 말했다.
다만 에틸렌 생산능력만 보면 울산이 세 단지 중 가장 작다. 여수가 642만t, 대산이 478만t인 반면 울산은 174만t(대한유화 90만t, SK지오센트릭 66만t, 에쓰오일 18만t)에 불과하다. 에쓰오일이 2026년 상반기 완공을 목표로 최신 공법인 석유화학 통합생산(COTC) 설비를 짓고 있어 180만t의 신규 생산능력이 더해질 예정이다.
울산 석화업계 관계자는 "대한유화와 SK지오센트릭을 합쳐 울산 내 수요를 자체적으로 책임지는 정도"라고 말했다.
현장에선 지역별로 NCC 감축규모를 일괄적으로 적용할 경우 울산산단은 오히려 수급 불균형으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견해가 나온다. 대한유화 관계자는 "온산공장에서 생산되는 에틸렌과 프로필렌은 대부분 자가 소비되기 때문에 감축을 강제하면 곧바로 외부 공급망을 새로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된다"고 설명했다. 석화단지는 파이프를 통해 원료를 공급받는데, NCC를 줄여 부족분이 발생하면 선박 등을 통해 공급받게 돼 비용이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자율 감축 논의 과정에서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다. 한국화학산업협회 관계자는 "정부가 정한 총량을 달성하려면 모든 산단이 일정 부분 부담을 져야 한다"며 "울산 역시 지역적 특수성을 감안하되, 합리적인 수준의 역할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울산=오지은 기자 joy@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