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TK(대구·경북) 법조인이면서도 호남 인사들이 중용된 김대중(DJ)정부 시절 검찰 조직을 이끄는 수장으로 발탁돼 2년 임기를 채운 박순용 전 검찰총장이 11일 별세했다. 향년 81세. 고인은 2024년 12·3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장을 맡아 윤석열 당시 대통령을 내란 우두머리 등 혐의로 재판에 넘긴 박세현(50) 전 서울고검장의 부친이다.
박순용(1945∼2026) 전 검찰총장. 사진은 총장으로 재직하던 2000년 7월 대검찰청에서 전국 공안 검사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박 전 검찰총장은 광복 직전인 1945년 5월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다. 명문 경북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으며 1967년 제8회 사법시험 합격을 통해 법조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동기생으로 이강국 전 헌법재판소장, 권성·김효종 전 헌재 재판관, 김중권 전 청와대 비서실장, 김평우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안강민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 장관 등이 있다. 육군 법무관 복무를 마치고 검사가 된 고인은 검찰에서도 최고 요직으로 꼽히는 법무부 검찰국장, 대검 중수부장, 서울중앙지검장을 모두 지냈다. 이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TK 정권에서 그가 ‘정통 TK 법조인’으로서 청와대와 법무부·검찰 지휘부의 신임을 받은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고인은 대구고검장으로 재직하던 1999년 5월 당시 대통령 DJ에 의해 검찰총장으로 전격 발탁됐다. 전임자인 김태정 총장이 법무부 장관으로 옮기며 생겨난 공백을 채운 것이다. 이를 두고 김 신임 장관이 호남 출신인 만큼 총장은 TK 출신을 앉혀 지역 안배를 이루려는 DJ의 의중이 반영된 인사라는 평가가 많았다. 그가 대검 중수부장으로 재직하던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불거진 이른바 ‘DJ 비자금 의혹’을 무난히 처리한 데 대한 보답이란 견해도 있다.
고위급 검사로는 드물게 정보기술(IT)에 관심과 지식이 많았던 고인은 임기 중인 2000년 2월 대검에 컴퓨터수사과, 전국 최대 검찰청인 서울중앙지검에 컴퓨터수사부를 각각 처음 설치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대검이 국내 최초로 ‘유전자(DNA) 감식 기법’을 특허 등록했다. 이듬해인 2001년 5월 검찰 지식관리 시스템 ‘이프로스’(epros)를 전국 검찰청에 구축한 것도 고인의 업적으로 꼽힌다.
대선을 앞둔 1997년 10월 박순용 당시 대검 중수부장(왼쪽)이 이른바 ‘DJ 비자금 의혹’ 처리 방향을 놓고 취재진과 일문일답을 나누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고인은 총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여야 정쟁에 휘말려 야당인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에 의해 탄핵소추안이 발의되는 등 시련을 겪었으나 DJ의 신임 아래 2년 임기를 지킬 수 있었다. 다만 호남 출신인 신승남 당시 대검 차장이 일명 ‘실세 차장’으로 불리며 총장보다 더 큰 권한을 행사하는 바람에 정작 고인의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2001년 5월 고인이 총장에서 물러난 뒤 후임 총장 자리는 모두가 예상한 대로 신 차장에게 돌아갔다. 역대 총장 중에는 퇴임 후 국회의원 선거에 여당 공천을 받아 후보로 출마하거나 법무장관 등 다른 공직으로 옮긴 사례가 많았다. 이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과 수사 공정성을 해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그를 의식한 듯 고인은 총장을 끝으로 일절 공직을 맡지 않음으로써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유족으로 부인 김혜정씨, 아들 박세현(법무법인 비앤에이치 변호사)·박세호(메타컬처스 이사)씨, 며느리 방정운·송윤희씨 등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14일 오전 7시30분, 장지는 서울추모공원. (02)3410-3151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