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형법은 법인의 형사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형사처벌의 대상은 자연인에 한정된다. 회사 임직원이 뇌물이나 리베이트를 제공한 경우에도, 처벌받는 것은 이를 실행한 개인일 뿐 회사는 형사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는 고의·과실이라는 주관적 인식을 전제로 하는 책임주의에 따른 설명이다. 그러나 이 논리가 오늘날 기업의 작동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실무에서 문제 되는 범죄의 상당수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회사 업무의 연장선에서 발생한다. 개인은 회사가 부여한 목표를 수행하고, 회사는 그 결과로 인허가나 거래 성과를 얻는다. 성과에 기여한 개인은 보상을 받지만 문제가 발생하면 회사는 책임에서 빠지고 개인만 처벌받는다. 이른바 '꼬리 자르기' 구조다.
해외의 선택은 다르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1909년 뉴욕 센트럴 앤드 허드슨 리버 철도 회사 사건에서 법인의 대리인이 리베이트를 제공한 경우 법인의 형사책임을 인정했다. 다수의 유럽 국가들도 법인을 형사처벌의 주체로 규정하고 있다. 범죄의 책임을 조직 차원에서 묻는 방식이다.
우리나라 역시 행정법 영역에서는 이미 유사한 사고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양벌규정에 따라 법령을 위반한 개인뿐 아니라 이를 감독할 지위에 있던 법인도 처벌한다. 법 위반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귀속시킬 것인지, 조직에도 분담시킬 것인지는 결국 정책적 선택의 문제다.
헌법재판소는 법인 대표자의 법규 위반은 법인의 행위로 볼 수 있으나 종업원의 행위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해 왔다. 그러나 현대 기업에서 종업원의 행위가 조직의 지시와 성과 구조에서 자유로운 독립적 판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필자의 실무 경험은 이러한 문제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국내 조선소에서 근무하던 시절, 유럽 에너지 회사가 발주한 해양시추설비 계약이 공정 지연 끝에 해지된 사건이 있었다. 발주자는 해저 지지대는 인수했지만 완성된 시추설비는 인수를 거절했고, 해외 중재가 진행되는 동안 해당 설비는 조선소 헤비존에 방치됐다. 설비 소유권이 상대방에게 있어 조선소는 이를 처분할 수도 없었고, 그 결과 헤비존은 장기간 사용 불능 상태가 됐다.
이는 타인의 재물 효용을 해하는 행위로서 손괴죄가 문제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우리 형법상 손괴죄의 주체는 개인에 한정된다. 발주자 법인은 애초에 처벌 대상이 될 수 없었고, 발주자 측 개인 역시 현실적으로 처벌이 어려웠다. 결국 형사책임은 공백으로 남았고, 행정법 위반을 문제 삼겠다는 의사를 밝힌 뒤에야 보상 논의가 시작됐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도 유사하다. 대표자 등 개인들은 형사처벌을 받았지만, 외국계 기업을 포함한 회사 자체는 형사책임을 지지 않았다. 개인 처벌 중심의 수사가 피해자에 대한 충분한 배상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법인의 형사책임을 인정할 것인지는 단순한 형법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조직과 책임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선택이다. 해외에서 영업하는 기업일수록 법인이 형사처벌을 받을 경우 인허가, 투자, 자금 조달 전반에 중대한 제약이 뒤따른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누가 범죄자인가"라는 질문에 이제는 개인만을 지목하는 방식이 과연 현실과 정의에 부합하는지, 다시 묻는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박수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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