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방어를 위해 국민연금의 수익성을 희생하고 있다. " 최근 국민연금의 환 헤지를 바라보는 일각의 비판이다. 이에 대해 외환 당국은 "국민 노후자산 희생이 아니라 오히려 보호"라고 반박했다. 환율이 오를 때 이익을 실현하고 헤지를 통해 수익성을 확보하는 게 장기적으로 국민 노후 자산을 지키는 길이라는 것이다.
환 헤지는 환율에 따른 변동 손익을 사전에 확정하는 것을 말한다. 최근과 같이 해외 주가와 환율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시기, 환 헤지를 실시하지 않아 커질 수 있는 손익 변동성을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 외환 당국은 특히 국민연금과 같이 해외투자자산 규모가 크고 투자 기간이 긴 기관투자자는 사전에 수익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므로 환율 변동 리스크를 관리할 필요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국민연금 기금 생애주기, 세계적으로 관찰하기 힘든 특이한 구조"외환 당국은 국민연금 기금의 생애주기(현금 흐름)를 고려한 유연한 환 헤지 정책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제5차 국민연금 재정추계에 따르면 기금의 최대적립 시점은 2040년(1775조원)이다. 이후 줄어들기 시작해 2055년엔 마이너스(-) 47조원으로 기금이 고갈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수익률을 4.5%로 가정한 결과다.
기금의 생애주기상 기금 적립기에는 해외투자 확대로 환율상승 압력이 커지고, 기금 감소 국면에는 해외자산 매각 과정에서 환율 하락 압력이 증대될 수 있다. 큰 규모의 자산을 가지고 있는 국민연금이 장기 시계에서 변동성을 완화하기 위해선 환 리스크 관리가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해 11월 금융통화위원회 통화정책방향 결정 회의 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자산 규모를 안정적으로 가져가는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관찰하기 힘든 특이한 구조"라고 짚은 것이 바로 이 기금의 생애주기다. 국민연금의 기금 운용 규모가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등 불확실하기 때문에 단기 평가 이익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실제 수익률을 어느 정도 확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총재는 지난 2일 신년사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원화를 갖고 나갈 때 원화가 절하되면 미국(해외)에서 수익률이 굉장히 높아지지만 갖고 올 때는 반대로 된다"며 이 같은 상황이 국민연금 수익률뿐 아니라 외환시장에 주는 왜곡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부가로 수익률이 높다고 해서 단기간에 노후자산이 커지는 게 아니므로, 환율로 어느 정도 이익을 본 후엔 헤지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회수 시 수익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진단이다.
'큰 손' 해외투자 확대, "거시적 관점서 다시 봐야 할 때"이 총재는 국민연금이 해외 투자 규모를 줄이는 방향으로 자산 배분 전략을 변경할 필요도 있다고 봤다. 이미 큰 손이 된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 확대가 원화 약세 요인으로 작용하며 다른 경제 주체뿐 아니라 국내시장 자체에도 영향을 주면서 시장 위축을 불러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에 따르면 2025년 10월 말 기준 국민연금 기금의 해외주식 투자 규모는 531조7000억원으로, 전체 기금 적립금(1427조7000억원)의 37.2%를 차지하고 있다. 해외채권 투자 규모는 98조7000억원으로, 전체의 6.9% 수준이다.
이 총재는 "2000년대 중후반만 해도 투자처 다변화를 위해 국민연금 해외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했던 사람 중 하나지만, 이제는 규모가 너무 커졌기 때문에 프레임워크가 바뀌어야 한다"며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거시적인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최적의(옵티멀) 포트폴리오를 짜는 건 이론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짚었다. 개인 등 민간의 해외투자가 늘어난 구조적 변화 상황에서 나라 전체의 포트폴리오에서 무엇이 최선인지를 고민할 때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민연금이 현재보다 환 헤지 등 위험 분산을 더 많이 하고 해외투자 규모를 줄여야 한다고 봤다.
환 헤지 비율이 0%로 알려진 해외 연기금도 달러채권 발행 등을 통해 실질적인 환 헤지를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총재는 "캐나다 연기금의 환 헤지 비율이 0%라고 하는데, 이곳은 20% 정도 달러채권을 발행해 채무를 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헤지하는 것"이라며 "규모가 클수록 환 위험을 헤지하지 않는 곳은 없다"고 강조했다. 최근 정부가 검토 중인 국민연금 외채 발행 역시 위험 분산 측면에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짚었다.
이 총재는 환율 쏠림 개선을 위해 국민연금의 헤지 전략이 보다 유연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외비인 전략적 헤지의 발동·해제 조건이 시장에 모두 노출돼 환율 방향에 대한 시장 기대에 쏠림이 생긴다는 이유에서다.
"국민 노후 볼모?…장기 시계 위험 분산 안 하는 게 도박"현재 환율 수준은 우리 경제의 기초 체력에 비해 높다는 게 외환 당국의 판단이다.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에 따른 외국인 자금 유입 등이 원화 가치 상승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란 분석이다. 이 전망에 따르면 국민연금이 1400원 후반 선에서 진행한 환 헤지는 시장에 달러를 풀어 외환시장 안정에만 기여한 게 아니라, 향후 환율 하락을 대비해 연금의 수익성을 일정 부분 확정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결과를 놓고 볼 때 환 헤지가 국민연금의 수익성에 마이너스로 작용할 수도 있다. 환 헤지에 따른 비용을 넘어서는 환율 하락이 이뤄져야 수익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외환 당국은 사후적인 환율 상승 또는 하락으로 환 헤지를 평가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환헤지는 수익의 급격한 변동성을 줄여 위험을 분산하는 '보험'에 가까운 장치이기 때문이다. 백봉현 한은 외환시장팀장은 "'환에서 오는 손익을 확정해 리스크를 줄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환헤지를 통해 이미 확보하고자 하는 목표와 목적이 달성됐다면 그 이외의 상황은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게 환 헤지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며 "환차손익 자체보다 의사결정의 합당한 사유, 내부지침준수 등을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총재 역시 "기금을 운용하는 입장에서는 '내가 정부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거시적인 영향을 다 보느냐'고 할 수 있다. 충분히 이해된다"며 "예측을 잘못해 손실이 생기면 그 책임을 묻고, 헤지를 해서 결과가 잘 되면 이에 대한 보상은 없는 구조가 개선돼야 하고, 이를 포함한 새로운 프레임워크를 4자협의체 등을 통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짚었다.
외환 당국 역시 보다 근본적으로는 국내 투자 환경 개선 등을 통해 국내 자본시장 경쟁력 자체를 강화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현재의 '과도한 원화 가치 하락'은 수급 쏠림과 결과이자, 상대적으로 투자 유인이 약한 국내 시장의 매력 부재에 따른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다만 이는 중장기 과제로 단시간 내 환율 안정을 불러오긴 힘든 부분이란 판단이다. 이에 대해 앞서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인공지능(AI) 대전환 시대에 해외보다 더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는 벤처와 산업을 육성하고 주주이익 보호, 불공정거래 근절 등 한국 시장의 매력을 높이기 위한 정책을 병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유리 기자 yr6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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