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통상산업부(MTI)는 2일 발표한 속보치에서 2025년 국내총생산(GDP)이 전년 대비 4.8% 성장했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 11월 제시했던 ‘약 4%’ 전망을 웃도는 수치다. 특히 4분기 성장률은 5.7%에 달했고, 제조업 생산이 15% 급증하며 성장을 견인했다. 반도체와 바이오 등 첨단 제조업이 AI 수요 확대의 직접적 수혜를 입었다는 평가다.
대만의 성장세는 더욱 두드러진다. 대만 행정원 주계총처(DGBAS)는 지난해 11월 28일 2025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7.37%로 상향 조정했다. 1인당 GDP는 3만8748달러로 한국과 일본을 앞설 것으로 예상되며, 올해는 4만 달러 돌파도 전망된다. 4분기 성장률 전망치는 3분기의 8.21%에 이어 7.91%로 상향됐는데, 이는 AI 관련 수요 확대에 힘입어 수출이 40% 가까이 급증한 데 따른 것이다.
반면 한국의 성장 경로는 뚜렷하게 대비된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11월 전망에서 올해 성장률을 1.0% 안팎, 내년은 1.8% 수준으로 제시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2일 신년사에서 “올해 성장률은 잠재 수준에 근접하겠지만, 반도체를 제외하면 성장률은 1.4%에 그쳐 부문 간 회복 격차가 크다”고 밝혔다. 그는 이를 “지속 가능하지 않은 K자형 회복”이라고 규정했다.
환율 부담도 겹친다. 이 총재는 최근 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 후반까지 오른 데 대해 “경제의 기초체력과 괴리가 있다”고 지적하며, 성장률·금리 격차와 해외 증권투자 확대에 따른 자본 유출을 원인으로 들었다. 환율 상승은 체감 물가를 끌어올리고, 달러 기준 1인당 GDP를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실제로 한국은 대만보다 높은 임금 수준에도 불구하고 생산성과 성장률에서 뒤처지며, 달러 기준 1인당 GDP에서도 역전당했다. 이는 단순한 경기 순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다.
아주경제가 실시한 신년 설문조사에서도 같은 인식이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한국과 대만의 성장 격차가 기업 투자에 대한 태도와 규제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했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대만은 토지·전력·용수·인허가 등 투자 과정의 병목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해소하고, 규제 도입 시 사전 예고와 의견 수렴을 통해 정책 예측 가능성을 높인다”고 평가했다.
반면 한국은 사후 규제와 처벌 중심의 제도가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아주경제 설문에서 응답자 전원이 이른바 ‘노란봉투법’이 기업의 자율적 경영 판단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답했다. 상법 개정과 정년 연장 논의 역시 경영 부담 요인으로 꼽혔다.
전문가들은 특히 AI 시대에 걸맞은 규제 철학의 전환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자율주행, 인공지능, 바이오, 드론처럼 기술 융합이 빠르게 진행되는 분야에서는 사전 규제보다 ‘선(先)허용·후(後)규제’, 실험과 검증을 허용하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도한 진입 장벽과 불확실한 법 집행은 혁신의 속도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리얼미터 조사에서 국민의 46.4%가 “내년 경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답한 것도 이런 체감 현실을 반영한다. 반도체 회복에도 불구하고 제조업 전반의 부진, 높은 물가, 불확실한 정책 환경이 경제 심리를 짓누르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방향 전환이다. AI 시대의 경제 운영은 속도·유연성·예측 가능성을 핵심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선투자·후규제 원칙 아래 기업이 먼저 도전하고, 정부는 위험을 관리하며 길을 여는 조력자가 돼야 한다. 규제 완화는 특혜가 아니라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한 최소 조건이다.
싱가포르와 대만이 보여주듯 성장은 기술만으로 오지 않는다. 제도와 정책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성과로 이어진다. 한국 경제가 다시 도약하려면, 체감할 수 있는 성장 전략과 현실에 맞는 규제 개혁이 올해 경제 운영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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