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개미지네”…광주 골목에 ‘김치 항아리’ 여성 나타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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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개미지네”…광주 골목에 ‘김치 항아리’ 여성 나타난 이유는
광주 ‘김치벨트’ 투어…‘K-미식벨트’ 사업 일환 ‘광주 부엌’ 양동시장부터 광주 김치타운까지 반지·꽃게김치 등 명인 가득한 광주 색깔 살려 “지역 식재료로 관광객 유인…30개 벨트 조성”
“고놈, 참 개미(게미)지네”

전라남도에서는 김치 맛이 제대로 들었을 때 이렇게 말한다. 매운맛도 짠맛도 아닌, 시간이 만든 맛이 입안에 감돌 때 나오는 말이다. 광주 김치가 삭힐수록 맛이 깊어지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집집마다 김치 담그는 방식이 다르고 재료의 배합도 간의 세기도 다 다르지만 세대를 이어 전해지는, 기억이 담긴 손맛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제 이 ‘개미’의 감각은 한국 식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김장을 함께 담그고 나누는 풍경은 세계 여러 도시에서 낯설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하나하나의 재료가 모여 22가지 효능을 갖췄다는 뜻에서 11월22일로 제정된 ‘김치의 날’은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 최근 유럽에서는 프랑스 파리가 처음으로 김치의 날을 공식 제정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광주 양림동 연극 투어 중 호랑가시나무 아래 김치 항아리와 함께 앉아 있는 ‘복순’.
이런 흐름에 발맞춰 한식을 단순 ‘먹는 경험’이 아닌 ‘여행하는 경험’으로 풀어내려는 시도가 속속 이어지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한식진흥원이 추진하는 ‘K-미식벨트’ 사업은 지역의 식재료와 문화, 사람의 이야기를 엮어 맛으로 도시를 이해하게 하는 프로젝트다. 남도 음식 문화의 거점인 광주광역시는 그중에서도 ‘김치’를 전면에 내세웠다. 광주는 ‘김치벨트’로 선정돼 광주 김치를 매개로 도시의 정체성을 풀어내고 있다.

광주 미식 여행의 처음은 의외로 골목에서 시작됐다. 지난달 20일 광주 양림동 호랑가시나무 언덕길. “선교사님께 빨리 김치 드리러 가야 하는디!” 품에 김치 항아리를 안고 한복을 입은 ‘복순’이 길을 안내했다. 도보 연극 투어는 지역 연극인들이 일제강점기의 한때를 연기하며 양림동 골목골목에 남은 근대 건물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양림동은 1899년 외국인 선교사들이 터를 잡고 한국인들과 함께 살며 병원과 학교를 세웠던 곳이다. 처음엔 김치 냄새를 낯설어하던 선교사들도 어느새 김치 없이는 살 수 없게 됐다고 한다.
광주 양동시장에 김치를 만들 때 꼭 필요한 젓갈이 즐비해 있다.
차를 타고 20여분 정도 이동하면 나오는 양동시장은 광주의 부엌 같은 곳이다. 전남에서 가장 큰 전통시장으로, 남도의 식문화가 한곳에 집약된 공간이다. 입구부터 살아있는 닭들이 크게 울고, 커다란 홍어를 칼로 써는 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특히 김장에 빠질 수 없는 배추와 무, 각종 젓갈을 파는 가게 앞에 손님들이 바글거렸다. 형제젓갈을 운영하는 김진현(50)씨는 “집집마다 만드는 방법은 조금씩 다르지만 광주 김치는 기본적으로 시원하면서도 감칠맛이 있다. 3~4가지 젓갈을 넣기 때문”이라며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중하가 색다른 맛을 준다”고 말했다.
식품명인 제76호인 오숙자(오른쪽)씨와 전수자이자 그의 딸인 윤다슬씨가 ‘반지’를 만들고 있다.
광주 김치 여정의 정수는 광주 김치타운에서 마무리됐다. 김치박물관을 지나 쿠킹클래스 공간에 들어서면 김치는 ‘배우는 음식’이 아니라 ‘전해지는 문화’라는 사실을 체화할 수 있다. 오숙자(84) 식품명인의 반지가 그 대표 사례다. 나주 오씨 가문에서 이어져 온 이 김치는 이름부터 독특하다. 물김치와 백김치의 성격을 함께 지녔다고 해서 ‘반(半)지’라 불린다. 실고추와 마늘, 생강, 버섯 등 20여가지 재료를 차례로 넣고 잘 섞은 뒤 절인 배추 사이사이에 넣고 볏짚으로 묶는다. 이후 양지머리 육수를 자작하게 부으면 완성. 간은 새우젓 등 젓갈로만 맞춘다. 감칠맛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한입 맛보니 맵지도 짜지도 않은, 삼삼하면서도 감칠맛 도는 물김치의 맛이 느껴졌다.
‘반지’에 김치소를 넣는 과정.
오 명인의 딸인 윤다슬(49) 전수자는 “어른뿐 아니라 어린이도 곧잘 먹는다. 냄새가 약해 외국인들도 좋아한다”며 “반찬이 아닌 하나의 요리로 내놓는다. 안주 삼아 먹기도 하고 숙취 해소에도 제격”이라고 설명했다.

박기순(65) 명인의 시연은 또 다른 방향에서 광주 김치를 조명했다. 그는 ‘꽃게 보쌈김치’로 2010년 김치명인콘테스트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장인이다. 고문헌 속 기록에서 출발한 이 김치는 다양한 해산물로 만든 광주 김치의 맛을 극대화해 보여줬다. 꽃게 살을 발라내고, 여기에 각종 채소와 젓갈을 더해 속을 만든다. 배추 세 포기에 큰 꽃게 한 마리가 다 들어갈 정도로 넉넉하게 살을 발라 넣고 화학조미료는 일절 넣지 않는다. 박 명인은 “전남 김치는 짜다는 편견도 있지만 최근 들어 많이 변화하는 추세”라며 “잘 익은 김치 몇 그램만 먹어도 2억마리의 유산균이 우리 몸속에 들어온다. 현대에 걸맞은 건강식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박기순 명인이 만든 ‘꽃게 보쌈김치’.
김치벨트를 포함해 농림부는 오는 2032년까지 총 30개의 벨트를 조성할 계획이다. 지난해 시범사업으로 장 벨트가 진행됐고, 올해 경북 안동시 전통주 벨트와 충남 금산군 인삼 벨트가 운영 중이다. 이규민 한식진흥원 이사장은 “K-미식벨트는 지역의 고유 식문화를 미식 관광으로 발전시킨 우리나라만의 사업”이라며 “한식이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 지속 가능한 문화콘텐츠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전했다.

광주=글·사진 김수연 기자 sooy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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