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 하남시의 보안검색장비업체 ㈜인씨스에서 근무하는 황희훈씨. 최근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오후 5시에 ‘칼퇴근’하고 금요일에는 오후 3시면 회사 문을 나선다. 어린이집에 맡겨놓은 아이와 함께 귀가하는 일도 잦아졌다. 황씨 뿐만이 아니다. 금요일 회식문화가 자연스럽게 사라지면서 운동이나 자격증 공부에 몰두하는 직원들이 늘었다. 이 회사가 올해 경기도의 ‘주 4.5일제 시범사업’에 참여하며 생긴 변화다. 용인시의 식품·화장품 제조사 ㈜셀로맥스 사이언스의 사정도 비슷하다. 주 35시간제를 채택하면서 시차 출퇴근제를 시행하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직원 54명 가운데 3분의 2가 넘는 20·30대 청년층 만족도가 특히 높다”며 “가족 간 친밀감이 높아졌다는 의견이 많다”고 전했다.
7일 경기도에 따르면 도내에서 전국 처음으로 시행한 주 4.5일제 시범사업에는 10월 말까지 모두 107개 기업(민간 106개, 공공 1개)이 참여했다. 참여 노동자만 3050명에 이른다.
지난 10월 김동연 경기도지사(가운데)가 주 4.5일제 시범사업에 참여한 용인시의 ㈜셀로맥스 사이언스를 방문해 직원들과 대화하고 있다. 경기도 제공 ◆ “근무시간 단축 外 업무·공정 개선…시스템 재정비가 핵심” 이 제도는 조기 대선을 앞둔 지난 6월 ‘임금 삭감 없는’ 주 4.5일제 형태로 도입됐다. 줄어든 근로시간만큼 도가 임금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회사마다 노사 합의를 거쳐 주 4.5일제, 주 35시간 또는 36시간 근무, 격주 4일제, 혼합형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 있다. 격주로 월요일을 쉬며 ‘월요병’을 피해 가는 근무 형태 역시 적용 가능하다. 일·생활 균형과 건강한 일터 조성, 중소·중견기업의 채용 경쟁력 강화 및 인력난 해소에 무게를 뒀다.
대상은 도내 사업장이 있는 300인 미만 기업이다. 노동자 1인당 월 최대 26만원(주 5시간 단축 기준)의 임금 보전 장려금을 지원받는다. 또 기업당 최대 2000만원 한도에서 업무 프로세스·공정 개선 컨설팅, 근태관리시스템 구축 등이 지원된다.
올해 예산은 83억원 안팎이다. 기업이 아닌 근로자에게 인센티브를 지원하고, 민간기업을 대상으로 생산성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게 기존 유연근무제와 다른 점이다.
시범 운용 직전에는 안팎의 우려가 적잖았다. 생산량이 떨어지거나 임금이 감소할 것이란 걱정이다.
주 4.5일제 시범사업에 참여한 하남시의 보안검색장비업체 ㈜인씨스. 경기도 제공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인씨스에서 11년째 일해온 황씨는 “처음 3주 정도는 ‘진짜 (집에) 가도 되느냐’며 다들 눈치를 봤다”면서 “그런데 대표가 ‘어서들 가라’고 먼저 말하면 금요일 오후 2시50분쯤 자연스럽게 퇴근 준비를 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근무시간이 줄었으니 정해진 시간 안에 일을 마쳐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겨 오히려 일의 능률이 올랐다”고 덧붙였다. 이곳에선 ‘업무 집중 시간’이 따로 운영된다. 이 회사의 남현식 대표도 “처음엔 겁이 났다”고 토로했다. 남 대표는 “근무시간이 줄어드는데 급여를 줄일 수도 없고, 다른 업체들이 어떻게 볼까 걱정도 됐다”며 “금요일 외근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는데, 막상 도입하고 나니 직원들이 거기에 맞춰 적응했다”고 말했다.
시범사업의 성과는 곳곳에서 회자되고 있다. 참여 기업은 IT, 제조업, 언론사까지 다양하다. 파주의 한 제조기업은 근로자의 건강 개선 효과를 봤고, 성남의 IT기업은 이번 사업 참여로 주 30시간까지 근로시간을 단축할 계획이다.
인재 유치와 조직 안정은 가장 큰 강점이다. 도 관계자는 “시범사업 이후 남양주의 한 건설사에선 10배가량, 놀이터 장비 제조업체에선 2배 이상 채용 경쟁률이 급증했다”며 “정보통신업체 근무자들은 단축 시간을 활용해 빅데이터 분석기사 자격증 등을 획득했고, 한 교육업체 종사자는 3개월 만에 11㎏ 감량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서울의 한 대형병원에서 고된 근무를 마친 간호사들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뉴스1 ◆ “4.5일제 해보니…근무시간은 줄고 생산성은 올랐다” 이 사업을 주관한 경기도일자리재단 관계자는 “현장을 방문해 인터뷰하면서 단순히 일하는 시간을 줄이기보다 일하는 방식에 대한 성과평가 체계 수립, 작업 환경 개선 등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컨설팅을 함께 진행하는 게 효과가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주 4.5일제 변화가 근로시간 단축을 넘어 업무 혁신을 꾀하는 노력이라는 얘기다.
이는 ‘워라벨’을 우선시하는 구직자들의 발길을 끌면서 노동시장의 고질적 문제인 ‘대기업 편중 현상’(노동시장 이중구조)의 해법으로도 주목받는다. 한 노동계 관계자는 “젊은층에선 월급을 좀 덜 받고 사회적 명예나 기준을 낮춰 잡더라도 삶의 질을 중시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며 “4.5일제 같은 정책을 통해 청년 구직자에게 회사의 매력을 ‘어필’할 수 있다고 본다”고 분석했다.
과제도 있다. 삶의 질 향상과 생산성 향상을 동시에 찾는 사업이다 보니 여러 논란이 일고 있다. 참여자들의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도덕적 해이)는 그중 하나다. 업무 효율성을 높이려는 다수의 노력이 있더라도, 업무시간 단축에만 편승하는 참여자들이 늘 경우 제도의 성과는 반감된다.
경기도의 경우 도내 사업체의 85%가 넘는 5인 미만 사업장은 애초 참여 기회조차 없어 사회적 공감대 확산을 위해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도는 시범사업을 추진하면서 1차 5인 이상, 2차 10인 이상, 3차 30인 이상으로 참여 기준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 주요 노동시간 단축 실험 사례. 세계일보 DB 다만, 이번 사업이 시범사업이고 세계적으로 4.5일제를 둘러싼 논란이 ‘진행형’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개선 여지는 상당해 보인다. 실제로 영국 사우스케임브리지셔 자치구에선 2023∼2024년 공공부문 직원 69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임금 삭감 없는 주 4일제 근무’를 통해 이직률 39% 감소, 시민 불만 건수 20% 감소라는 효과를 봤다.
2015∼2017년 진행된 아이슬란드 근로시간 단축 실험은 전체 노동인구의 1%인 2500명을 대상으로 했는데, 주 35∼36시간까지 근로시간이 단축되면서 번아웃 42% 감소, 노동생산성 3.8% 증가라는 결과가 나왔다. 2022년 미국·영국·캐나다 기업 90여곳을 대상으로 6개월간 이뤄진 주 4일제 실험인 ‘4 Day Week Global’에선 번아웃 71% 감소, 매출 35% 증가, 이직률 감소 57%라는 수치가 검증됐다.
지난 6월 경기도 수원 라마다프라자호텔에서 열린 주 4.5일제 시범사업 업무협약식. 경기도 제공 앞서 김동연 지사는 지난 10월 시범사업 참여 기업을 방문해 “주 4.5일제가 생산성과 워라밸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며 “주 4.5일제를 정착시키고 이를 징검다리 삼아 주 4일제까지 갈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최대한 많은 기업이 참여하도록 유도했는데, 시범사업이다 보니 여러 논란이 있을 수 있어서 시행결과가 직원들 삶의 질 상승뿐만 아니라 기업의 생산성 향상까지 된다는 증거를 찾고 싶다”며 “사업 추이를 지켜봐 달라”고 했다.
경기도는 시범사업을 올해부터 2027년까지 한시적으로 펼쳐 노동생산성, 직무만족도 등 44개 세부지표를 분석할 예정이다. 분석 결과를 토대로 적정 노동시간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고, 정부에 개선을 건의할 방침이다.
수원=오상도 기자 sdo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