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서울대 동양사학과에 ‘기념비적’이라 불릴 만한 박사학위 논문 한 편이 제출됐다. 14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반까지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서남아시아, 캅카스 산맥, 북인도, 중국 서부에 이르는 지역을 정복해 대제국을 세운 티무르조(朝)의 시조 아미르 티무르(1336∼1405)의 일대기와 그의 연전연승을 기록한 페르시아어 역사서 ‘승전기’의 해제와 역주를 담은 1140쪽 분량의 연구였다. 사학 논문은 주제와 사료, 연구 방식에 따라 분량 편차가 크지만 같은 학과 박사논문이 대체로 200∼400쪽임을 감안하면 이 논문은 분량 자체가 파격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연구 의의다. 이 논문은 이슬람권 바깥 언어로 ‘승전기’ 전문을 완역한 세계 최초의 연구였다. 15세기 페르시아 학자 야즈디의 ‘승전기’는 ‘세계 정복자’라 불리는 정복 군주 티무르의 출생·가계·초기 성장부터 서아시아·아나톨리아·인도 원정, 마지막 중국 원정 준비와 사망까지를 담은 일대기다. 수 세기 동안 페르시아 이슬람 문화권에서 널리 읽힌 고전이며 현전하는 사본만 200여종에 이르지만, 비(非)이슬람권 언어로 전문이 번역된 적은 없었다. 이주연의 박사논문이 그 첫 사례였다. 이번에 출간된 ‘티무르 승전기’는 해당 논문을 바탕으로 대중 독자를 위한 교양서로 재구성한 책이다. 저자는 ‘승전기’ 속 336개 이야기를 사건 순서와 티무르 제국의 발전 과정에 따라 새롭게 배열했다. 여기에 당시 중앙유라시아의 정세를 보여주는 지도, 티무르의 가계도와 연대표, 주요 인물 설명, 충실한 해제를 덧붙여 방대한 원전을 이해하도록 도왔다.
샤라프 앗딘 알리 야즈디/이주연 옮김/사계절/3만3000원 몽골제국은 13∼14세기 ‘팍스 몽골리카’를 구가했으나, 14세기 중반 급속히 붕괴한 뒤 몽골초원에서는 100년 넘게 내전이 이어졌다. 제국이 남긴 공백을 두고 여러 세력이 흥망을 거듭한 가운데 ‘몽골제국의 계승’을 내세운 대표적 나라가 티무르 제국이었다. 1405년 명나라 원정길에서 사망하기까지, 티무르는 중앙유라시아를 종횡하며 수많은 민족과 지역을 정복했고, 역사서 편찬을 통해 자신이 ‘신으로부터 세계 정복의 명을 받은 존재’임을 선전했다. 티무르는 알렉산드로스·칭기즈칸과 함께 ‘세계 정복’을 실질적으로 수행한 극소수의 인물이다. 그의 제국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터키 동부·이란·이라크, 아제르바이잔·조지아, 아프가니스탄, 인도 북부, 러시아 남부에 이르렀다. 자연히 이 책은 ‘잔인한 정복자’의 역사 기록을 넘어 동서 문명 접경지대의 정치·문화적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읽힌다. 한국과 동아시아 중심의 세계관에 익숙한 국내 독자에게, 기존의 시야를 넘어서는 세계사적 관점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다. 여말선초 시대 유라시아 질서 재편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규희 기자 lk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