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가늠할 수 없는 방 안에서 각본가 이(심은경)는 책상에 앉아 육필로 원고를 작성한다. 도시에서 바다를 찾아온 여자(가와이 유미)가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의 원고에서 영화의 화면은 바로 그 바닷가로 향한다. 지루할 정도로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여자는 여기저기 헤매다 어느 해변에서 청년 나쓰오(다카다 만사쿠)와 우연히 만난다. 두 남녀는 이상한 거리감과 속도로 가까워지며 밤 산책에 동행하거나 비 오는 바닷가에서 다시 만난다. 시사회에서 이는 완성된 영화를 걱정스러운 듯 지켜본다. 글을 쓸 동력을 잃은 이에게 작품을 칭찬한 스승마저 돌연사하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난 선생님의 장례에 모인 조문객과 유족에게 슬픔은 이상하리만치 보이지 않는다. 선생님이 남기고 간 수십 대의 카메라 중 하나를 손에 받아 든 이는 언어에서 멀어지고자 훌쩍 여행을 떠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새벽의 모든’을 연출한 미야케 쇼 감독의 ‘여행과 나날’은 두 편의 만화를 원작으로 삼는다. 1950년대에서 1980년대 사이 활동한 만화가 쓰게 요시하루의 ‘해변의 서경’과 ‘혼야라동의 벤상’이 그것이다. ‘해변의 서경’은 이가 각본을 쓴 극중극에서의 여름, ‘혼야라동의 벤상’은 완성된 영화의 시사회와 은사의 죽음 이후 이가 떠난 여행에서의 겨울이다. 세상에 드러난 모든 현상을 말에 가두는 일에 지친 이가 터널을 지나 도착한 곳은 가느다란 눈발이 나부끼는 설국이다. ‘여행과 나날’은 뜨겁고 나른하며 불안함을 자아내는 청춘의 여름에서 시간이 고여 있는 중년의 겨울로 훌쩍 뛰어넘는다. 머물 데 없는 추운 곳에서 이는 눈길을 더듬어 지도에도 없는 벤조(쓰쓰미 신이치)의 여관을 찾아간다.
극중극에서 드러난 계절에서 여름의 미풍과 태풍을 예고하는 바람결에 수만 개의 잎사귀가 서로 부대끼는 초록은 여러 차례 반복된다. 이의 겨울 여행에서도 몇 번 반복되는 장면이 있다. 밖에서 바라본 벤조의 여관을 비춘 꾸밈 없이 단순한 숏이다. 생명의 기척과 생활의 흔적이 두꺼운 눈으로 덮여버리고 만 여관은 그 숏이 지속되는 시간 동안에 세상에서 사라진 모든 예스러운 것을 향한 정념을 불러일으킨다. 어디에도 없을 듯한 이곳을 소리가 사윈 겨울밤의 적막 속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 사람의 생애와 기억에서 오래 묵고 잊힌 것이 여관의 낡은 문을 열어젖혀 연기처럼 피어날 것만 같다. 미야케 쇼는 이 작품에서 영화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담고자 했다고 밝힌다. 계절과 바람은 물론 여름의 묵직한 공기나 겨울의 숨결도 그럴 것이다. 소란하던 여름의 밤바람이 멎은 순간의 고요와 눈 내리는 밤의 긴 적막이 ‘여행과 나날’에는 모두 담겨 있다. 눈이 소복이 쌓이기 시작한 오후를 ‘침묵이 물질이 된다면 눈이 되리라’라고 말한 소설 구절처럼 여행의 겨울 챕터에서 말도, 소리도 사라진 그곳을 조용히 들여다보면 마침내 고요의 형태가 드러난다. 유선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