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개봉한 영화 ‘승부’는 사제지간에서 라이벌이 되는 조훈현(72) 9단과 이창호(50) 9단의 실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990년대 초 당시 바둑계를 호령하던 조훈현이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전북 전주의 소년 이창호를 발견하고, 그를 제자로 삼아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며 프로기사로 키워내는 이야기다. 어느 순간 이창호가 조훈현을 뛰어넘을 만큼 성장하면서 겪는 두 사람의 갈등과 애정을 보여준 이 영화는 두 천재의 진정한 승부를 잘 보여줬다는 평가와 함께 많은 관심을 끌었다.
어린 소년이었던 제자 이창호가 이제 드디어 스승을 넘어서 한국 바둑사에 새 이정표를 남겼다. ‘수소도시 완주’의 주장인 이창호 9단은 1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 바둑TV 스튜디오에서 열린 2025 인크레디웨어 레전드리그 플레이오프(PO) 2차전에서 ‘고고(GOGO) 양양’의 김수장 9단을 159수 만에 흑 불계승으로 제압했다. 이로써 이창호는 개인 통산 1969승(1무 814패)째를 달성해 스승인 조훈현 9단을 넘어 한국 바둑 최다승 신기록을 썼다. 특히 이번 대국은 이창호가 자신의 첫 타이틀을 획득했던 1989년 제8기 KBS바둑왕전 결승에서 만났던 김수장을 상대로 최다승 신기록을 달성해 더욱 의미가 깊었다.
이창호 9단이 1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 바둑TV 스튜디오에서 열린 2025 인크레디웨어 레전드리그 플레이오프(PO) 2차전에서 김수장 9단을 꺾고 1969승이라는 역대 최다승 신기록을 세운 뒤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국기원 제공 스승인 조훈현의 기록을 넘어서기까지는 39년여가 걸렸다. 만 11세였던 1986년 8월 프로 입단해 조영숙 초단(이하 당시 단)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둔 이창호는 2000년 10월에 안조영 6단을 꺾고 1000승을 수확했고 2010년 1월 1500승(상대 최철한 9단), 2021년 2월 1800승(상대 한웅규 7단), 2024년 9월 1900승(상대 유창혁 9단)을 차례로 달성했다. 이창호는 메이저 세계대회 결승만 무려 28회 진출했으며, 17회 우승으로 역대 최다승 1위 기록을 가지고 있다. 14세에 제8기 바둑왕전에서 우승하면서 국내 최연소 종합기전 타이틀을 획득했다. 또 16세에 제3기 동양증권배에서 우승하면서 세계 최연소 세계 종합기전 우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41연승으로 최다연승, 13관왕으로 최다관왕 기록도 가지고 있으며, 1998년 모든 메이저 세계대회(후지쓰배·동양증권배·삼성화재배·LG배·춘란배) 결승에 진출한 기록도 있다. 지천명의 나이에 달한 이창호는 올해도 51승 13패로 높은 승률을 자랑하며 여전히 녹슬지 않은 기력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스승 조훈현과 승부에서 197승 119패로 앞서고 있다. 지난 17일 경남 사천에서 조훈현을 173수 만에 흑 불계승으로 꺾으면서 대한민국 바둑 통산 최다승 기록에 1승 차로 다가서는 등 스승을 상대로 11연승을 기록 중이다.
이창호는 ‘신산(神算)’이라 불릴 만큼 고도의 집중력을 바탕으로 정교한 계산을 통한 수읽기에 능하다. 무엇보다 이창호의 바둑은 초반에 거침없이 몰고 가는 화려함보다는 중후반, 그것도 가장 마지막 끝내기 단계까지 포기하지 않고 상대를 괴롭히며 실수를 유발하게 하거나 승기를 굳히는 스타일이다. 침착함과 꾸준함이라는 그의 성격이 바둑판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창호는 자신의 이름 앞에 ‘최연소’ ‘최다’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에 익숙했지만 그의 별명인 ‘돌부처’처럼 대기록을 세운 날도 여전히 침착했다. 대국 직후 가진 방송 인터뷰에서 그는 스승을 넘어선 소감을 묻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말을 아꼈다. 이후 한국기원을 통해 이창호는 “지금까지 많은 바둑을 뒀지만 이렇게 뜻깊은 기록을 세우게 되어 영광스럽다”며 “어렸을 때부터 너무 좋아한 바둑을 지금까지 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아울러 “앞으로도 더 좋은 바둑을 보여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송용준 선임기자 eidy015@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