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서울 사무실을 열고 이듬해 1월 스트리밍 서비스 개시를 공식 발표한 넷플릭스. 국내 서비스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찻잔 속 태풍’에 머물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지만, 2017년 봉준호 감독 영화 ‘옥자’에 투자하며 본격적으로 한국 시장에 닻을 올렸고, 2019년 ‘킹덤’으로 한국 오리지널 콘텐츠 투자를 확대했다. 그리고 ‘오징어 게임’ 시리즈로 결실을 맺었다. 2025년 현재, 넷플릭스는 막강한 콘텐츠 파워를 기반으로 국내 시장을 재편하는 행위자다.
넷플릭스 로고. AFP연합 넷플릭스는 한국 제작사에 막대한 제작비와 높은 자율성을 보장했고,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든 한국 제작자와 배우들을 세계 무대에 올려놓았다. 그만큼 한국 콘텐츠의 가치도 끌어올렸다. 불과 10년 만에 거둔 성취로는 이례적이다. 그러나 넷플릭스의 독주가 드리운 그림자도 뚜렷하다. 미디어 문화연구자인 김아영(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문화교류연구센터장)은 지난달 30일 펴낸 책 ‘넷플릭스 딜레마’(사진·현실문화)에서 통시적 분석을 통해 한국 방송영상 산업이 어떻게 넷플릭스의 ‘하위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게 됐는지 추적한다. 그는 한국 방송영상 산업이 넷플릭스 체제에 ‘종속’됐다고 진단한다. 국내 제작자본의 자주성이 약해 넷플릭스에 딸려 붙는 상황, 그리고 글로벌 규모의 한국 OTT가 부재해 유통을 외부 플랫폼에 일임하는 상황이 ‘종속’ 구조를 구성한다.
지난달 30일 전화 인터뷰에서 김 센터장은 “넷플릭스를 악마화하자는 게 아니라 글로벌 OTT를 대표하는 메타포로 사용한 것”이라며 “이 단어를 다른 글로벌 OTT로 바꿔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김아영 센터장. 문제는 국내 방송영상 업계가 글로벌 플랫폼의 콘텐츠 엔진을 촉진하는 로컬 스튜디오로 재편되는 사이, 대부분의 제작자는 제작비 폭등, 편성 축소, 일자리 불안정이라는 폭풍을 맞고 있다는 점이다. 김 센터장은 “소수의 특권층만이 넷플릭스와 꾸준히 작업할 수 있는 구조이지만, 그럼에도 넷플릭스가 불가역적인 힘을 구축한 탓에, 이 역작용에 누구도 반기를 들기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책은 그의 박사학위(서강대 신문방송학과) 논문을 개고한 것이다. 2022년 초 학위논문을 준비하며 그는 넷플릭스와 협업했거나 오리지널 작품을 납품한 이력이 있는 PD·감독 등 17인을 인터뷰하며 자료를 모았다. 이후 2025년 초 책 출간을 준비하며 이들 중 일부를 다시 만났다.
제작자들의 분위기는 3년 사이 극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처음엔 ‘넷플릭스 덕분에’라며 환호하던 이들이, 다시 만났을 땐 ‘넷플릭스 때문에’라고 말하더라.”
책에는 여러 제작자의 구술 인터뷰가 실려 있다. 제작자들은 넷플릭스와 글로벌 OTT 유입 이후 노동 과정과 제작 시스템이 어떻게 변했는지, 또 어떤 이슈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는지 들려줬다. 인터뷰 참여자 모집도 쉽지 않았다. 제작비 관련 질문에 대부분 입을 닫았다. 넷플릭스가 계약 내용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외부 발설 시 제작비의 몇 배를 배상해야 하는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김 센터장은 “2023년 여름 졸업 후 산업 변화가 너무 빨라 2025년에 다시 제작자들을 만나야 한다고 판단했다”며 “글의 방향이 현실과 어긋나지 않는지 점검하는 과정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의 인터뷰에는 “(넷플릭스는 제작자들의) 종교 같다”, “나 역시 번호표를 들고 기다리는 심정으로 글로벌 OTT와의 협업을 꿈꿨지만, 동시에 그래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는 등 제작자들의 솔직한 우려가 담겼다.
한국 콘텐츠가 더 이상 넷플릭스의 기업가치를 올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오리지널’ 제작을 위한 투자가 끊일 경우를 우려하는 현장의 목소리도 담겼다. “넷플릭스가 사라지면, 그 자본에 기대 만든 글로벌 OTT향(向) 전문 제작사들은 모두 문을 닫을 것”, “스태프와 배우의 단가가 너무 올라 지속 가능성이 의문”이라는 암울한 예견이다. 제작비와 배우 출연료가 훨씬 낮은 일본으로 뛰어들어 일본 드라마 제작에 도전하는 제작자들의 흐름도 언급된다. 김 센터장은 동맥경화에 걸린 방송영상 산업의 구조적 문제를 풀기 위한 핵심 과제로 ‘유통 문제 해결’을 가장 먼저 꼽는다. 해외 유통 판로를 뚫기 어려운 중소 제작사가 구작 리마스터링 콘텐츠와 소위 ‘비(非)A급’ 콘텐츠를 팔아줄 수 있는 유통 에이전시가 필요하며, 정부가 이를 후방에서 지원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여러 방송사와 공공기관이 넷플릭스의 파트너가 되어가는 이 순간에도 방송의 공공성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규희 기자 lk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