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은 영혼이 없다. "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회자되는 말이다. 집권당의 정치 성향에 따라 정부 정책이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는데, 공무원도 별수 없는 월급쟁이라 정권의 코드에 맞춘다는 것이다. 가계부채를 관리하는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의 "빚투가 레버리지의 일종"이라는 발언은 피해의 실체가 없다는 점에서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지난 1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은 영혼 없는 공무원이 어떻게 공동체의 발목을 잡는지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대형마트와 기업형슈퍼마켓( SSM)에 대한 영업규제 일몰을 연장하는 이 개정안은 지난 9월 국회 소관 상임위인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물론, 이달초 법사위와 본회의에서 처리되는 과정에서 한 차례의 찬반 토론도 이뤄지지 않았다.
주무부처인 산자부는 상임위 소위 법안 심사 과정에서 "전통시장·소상공인 보호시책이 장기적이고 안정적으로 추진될 필요가 있다"면서 규제 연장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낸 것이 큰 역할을 했다. 산자부는 지난해 윤석열 전 대통령이 신년사를 통해 대형마트 영업규제 완화를 약속한 직후 이를 이행하기 위한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을 추진했는데, 1년여만에 정반대의 입장으로 돌아선 것이다. 여기까지는 영혼 없는 공무원의 필연적인 고충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문제는 산자부가 해당 규제의 일몰 연장의 근거로 활용한 연구용역 보고서다. 이달 23일 일몰 예정이던 대형마트 영업규제의 실효성을 알아보기 위해 수행된 연구는 표본 선정부터 분석 방법까지 부실했다. 최근 5년간 대형마트와 SSM 출점 지역내 신용카드 데이터 매출 정보롤 활용해 이들 규제 대상의 출점 전후 주변 소매점의 매출 변화를 분석했는데, 분석 대상은 2000개가 넘는 점포 가운데 17곳(대형마트 8개·SSM 9개)에 그쳤다. '데이터 3법' 개정에 따라 카드 빅데이터는 광범위하게 활용 가능하지만, 소수의 표본을 선정한 것이다.
또 유통법에는 상권 분석 기한을 3년으로 명시했지만, 해당 연구는 점포 출점 후 150일을 장기 효과로 분석했다. 더욱이 2~3주 단위 단기 변화를 관찰 할 때 사용하는 회귀분석기법(RDiT)으로 60일 이상 출점 효과를 측정해 소매업종에서 매출감소를 유발한다고 결론냈다. 법률까지 위반하면서 결과를 왜곡한 것인데, 이쯤되면 부적절한 연구 방법의 고의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해당 보고서는 소비자 1000명을 대상으로 유통매장 이용 실태를 조사한 뒤 "대형마트 및 SSM을 이용할 수 없는 경우 소비자들은 온라인 쇼핑몰을 이용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규제 대상인 대형마트와 SSM의 경쟁업체가 전통시장이나 소매점이 아닌데도 산자부는 영업규제 연장에 찬성한 것이다.
타당성이 결여된 연구는 정책의 신뢰만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다. 공정사회의 근간을 흔들수 있다. 현재 SSM의 절반은 가맹점이다. SSM는 2013년 규제 초반 대기업 운영 매장이 압도적이었지만, 지난 십수년간 소상공인의 창업 아이템으로 바뀌었다. 시대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정책 탓에 SSM을 운영하는 소상공인은 편의점과 달리 차별적 영업규제를 받는 억울한 상황에 놓였다. 산자부 연구용역보고서에서 이같은 점이 반영됐다면 법사위 체계자구 심사에서 가맹사업법과 충돌 여부를 면밀하게 검토했을 수 있고, 제대로 된 논의조차 없이 유통법 일몰 연장이 처리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연진 기자 gy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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